1922년 5월 말, 파리 오스망 대로 102번지
(이 편지는 얇고 결이 고운, 크림색 종이에 쓰여 있으며, 잉크는 희미하게 바래가는 보랏빛을 띤다. 글씨체는 섬세하고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때로는 너무나 미세하여 마치 거미줄처럼 보인다. 문장들은 페이지의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빽빽하게 이어지며, 잦은 수정과 첨가의 흔적이 문장들 사이에 작은 기호들로 남아있다.)
친애하는 조이스 씨에게,
이 편지가 부디 당신의 안식, 혹은 적어도 당신의 눈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어스름한 반그늘(penumbra)의 상태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저의 방은 외부 세계의 모든 침입으로부터 코르크라는 연약한 갑옷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이 영원한 황혼 속에서, 시간은 시계의 기계적인 전진이 아니라 제 혈관을 흐르는 피의 느리고 고통스러운 맥동으로만 측정될 뿐입니다. 이러한 고립된 공간에서 펜을 드는 행위는, 마치 심해의 잠수부가 수면 위의 세상으로 조심스럽게 통신을 보내는 것과도 같은, 상당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며칠 전 마제스틱 호텔에서 있었던 우리의 만남—'만남'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덧없고 불완전한 교류를 묘사하기에 적합하다면 말입니다—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날 밤의 소음과 현기증 나는 불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대화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서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두 난파선의 선장들처럼, 그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눈'에 대해, 저는 저의 '위장'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주변에서 우리의 만남에 문학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던 이들에게는 얼마나 실망스러운 희극이었을까요. 그들은 아마 두 개의 항성이 충돌하여 새로운 성운이 탄생하는 광경을 기대했겠지만, 정작 목격한 것은 삐걱거리는 두 개의 낡은 기계가 서로의 고장 난 부품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였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방으로 돌아와, 그날 밤의 인상을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표본처럼 반추해보았을 때, 저는 우리의 그 짧고 육체적인 대화가 실은 그 어떤 심오한 예술론보다도 더 본질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정직한 언어, 즉 고통받는 육체의 언어로 서로의 예술적 조건에 대한 가장 깊은 고백을 주고받았던 것은 아닐까요?
당신께서는 '눈'의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예술가에게, 특히 당신처럼 가시적인 세계의 모든 편린들을 수집하여 그것들을 의식의 용광로 속에 쏟아붓는 작가에게 '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빛을 감각하는 기관이 아니라, 세계를 포획하고 해부하는 제1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눈이 멀어간다는 것은, 당신의 예술이 그 원료를 공급받는 통로가 서서히 차단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감히 추측해봅니다. 당신의 그 고통스러운 시력이야말로 당신 예술의 원천이 되는 역설적인 축복은 아닌지요. 건강하고 명료한 시력은 세계의 표면을 매끄럽게 훑고 지나가지만, 당신처럼 고통받는 눈은 빛의 입자 하나하나, 사물의 가장 미세한 윤곽선, 거리의 인파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색채의 뒤섞임을 더욱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할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아마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렌즈를 통해 들어온 왜곡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당신의 내면에서 더욱 격렬하게 '재구성'하도록 강요받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작품 『율리시스』를—비록 저의 쇠약한 정신으로는 몇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버거운 도전이었습니다만—읽었을 때 제가 느꼈던 충격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 그린 안정된 풍경화가 아니라, 극심한 편두통 속에서 시야가 터져나가는 순간을 기록한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단어들은 논리적인 질서를 따라 배열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로 부딪히고, 깨지고, 뒤섞이며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 원초적인 소음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현상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루라는 시간의 틀 안에 한 도시의 모든 소리, 모든 냄새, 모든 생각의 조각들을 쏟아부음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밀도를 무한대로 폭발시켜 버리는 듯했습니다. 당신의 '눈'은 외부 세계의 모든 자극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검은 태양과도 같아서, 그 압도적인 인상의 무게 아래 독자는 길을 잃고 맙니다.
이는 제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방식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의 '위장', 그날 밤 제가 불평했던 저의 이 불쌍하고 예민한 기관은 제 예술의 방식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은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세계를 한 순간에 삼키지 못합니다. 저는 경험이라는 음식을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섭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이 코르크 방이라는 어두운 위장 속으로 들어와,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그것을 천천히 소화시켜야만 합니다. 저에게 경험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내면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어야 하는 물질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우연한 순간에—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처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소리처럼, 뻣뻣하게 풀을 먹인 냅킨의 감촉처럼—과거의 한 경험이 그 본질만을 남긴 채 순수한 감각의 형태로 제 안에서 되살아납니다.
이것이 제가 '무의식적 기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나 지성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의 한 감각을 열쇠 삼아 스스로 문을 열고 나타나는 '계시'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현재라는 폭풍의 눈 속에서 세계의 모든 파편을 그러모은다면, 저는 시간이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후에야, 그 폐허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향기나 맛의 유령을 불러내는 고고학자와 같습니다. 당신의 예술이 '포획'의 예술이라면, 저의 예술은 '발굴'의 예술입니다. 당신의 '눈'이 밖을 향해 있다면, 저의 '위장'은 안을 향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적,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던 시절의 일이 떠오릅니다. 그곳에는 당대의 모든 지성과 명성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서로의 허영심을 비추는 거울 놀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화가 엘스티르의 신작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 그림은 카르크푸르 해변의 풍경을 담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료한 형태를 무시하고, 순간의 빛과 대기의 인상만을 포착한 작품이었습니다. 공작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저게 그림인가요? 마치 팔레트를 캔버스에 그대로 문대버린 것 같군요.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할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은 '실제' 해변의 모습과 그림을 비교하며, 그 그림이 얼마나 '사실적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그림 앞에서 다른 종류의 진실을 보았습니다. 엘스티르는 우리 눈의 망막에 맺히는 광학적인 이미지를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이 특정 순간, 특정 장소에서 느꼈던 '인상' 그 자체를 그리려 했습니다. 눈부신 햇살에 눈이 멀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안개 속에서 교회의 첨탑이 마치 바다 위의 섬처럼 떠오르는 착각,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뒤섞여 형태가 아닌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해변. 그것은 지성이 개입하기 이전의, 가장 원초적이고 정직한 지각의 기록이었습니다. 공작부인과 그녀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해변을 그림 속에서 찾으려 했지만, 엘스티르는 자신이 진정으로 '느꼈던' 해변을 그렸던 것입니다.
조이스 씨, 당신의 『율리시스』를 읽으며 저는 게르망트 살롱에서의 그날 저녁을 떠올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의미 없는 단어들의 혼란스러운 나열일 뿐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소설의 형식—질서정연한 플롯, 일관된 인물, 명료한 문장—을 당신의 책 속에서 찾으려 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당신이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한 남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인상' 그 자체를, 지성의 검열을 거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려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설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업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과 저는 서로 다른 도구와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결국 '습관'과 '지성'이라는 두꺼운 각질에 덮여 우리가 진정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세계의 맨살을 드러내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본다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실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여 현재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매일 보는 아내의 얼굴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녀의 주름이나 눈빛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그저 '아내'라는 기호를 인식할 뿐입니다. 지성은 이 모든 복잡한 감각들을 '사랑', '슬픔', '도시'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 정리해버림으로써, 그 생생한 구체성을 거세해버립니다.
예술가의 임무는 바로 이 죽어버린 세계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어의 논리를 파괴하고 의식의 소음을 그대로 들려줌으로써, 저는 무의식적인 기억을 통해 과거의 한 순간을 현재 속에 완벽하게 부활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하루는 저의 수십 년과 같고, 당신의 더블린은 저의 콩브레와 같습니다. 당신의 레오폴드 블룸과 저의 샤를 스완은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혹은 붙잡을 수 없는 현재를 떠도는 유령들입니다. 그날 마제스틱 호텔에서 만난 것은 두 명의 작가가 아니라, 네 개의 유령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의 조이스와 프루스트, 그리고 그들 안에 살고 있는 작품 속의 블룸과 스완 말입니다.
이 편지가 너무 길어졌음을 압니다. 저의 글은 언제나 제 생각의 미로를 따라 길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 자체가 저의 문학적 방법론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생각들을 불러내고,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무늬.
부디 저의 이 과도한 분석과 장황한 사변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날 밤의 실패한 만남이 제 안에 남긴 지적인 갈증이 이토록 무례한 편지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눈'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날, 이 은둔자의 편지에 짧은 답신이라도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만남은 그 시끄러운 호텔의 금박 장식 아래서가 아니라, 이 침묵하는 종이 위에서, 서로의 고독이 잉크가 되어 만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건강과, 당신의 위대한 작업을 기원하며.
마르셀 프루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