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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Sep 13. 2024

장기매매가 무서워

어젯밤 11시였다. 내가 연락하고 있던 대상은 100킬로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 동행해도 될까요?


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습관, 세 번은 돌이킬 수 없다고 했던가. 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다시는 동행을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건만, 렌트 여행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뚜벅이도 하루쯤은 자동차를 타고 싶었다.

하필 그때 네이버 카페에서 동행을 구한다는 글을 본 것이다. 양심고백 : 내가 찾아낸 것임. 그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을 보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도!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큰 덩치를 가졌다는 정보뿐인 의문의 남성. 무서워. 그래도 가고 싶어. 그렇지만 무서워. 그래도 가고 싶... 에라 모르겠다, 눈 꼭 감고 메시지를 보내버렸다.

혹여나 장기매매를 노린 범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 또한 건장한 남자인 척 무장하여 연락을 지속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로 컨셉을 굳건히. 이름이 중성적이라 다행이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동네(잘츠부르크)에 있던 게 아니라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의 동네(인스부르크)에 묵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있는 곳까지 두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거기서 다시 차를 타고 알프스까지 가야 했다. 거기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을 즈음, 그가 대답했다.


- 렌트비는 필요 없어요. 커피 한 잔만 사주세요.


렌트비가 공짜라고? 이거 장기매매 하겠다는 말 맞지? 게다가 그는 한 번 더 거들었다.


- 언제 출발할지 말해주시면 그때 맞춰 지하철역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나의 내장 값이라고 생각하니 점점 더 겁이 났다.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할까. 그때 그의 마지막 한 마디.


- 남성이시면 바로 여기로 오실래요?


아, 내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하게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살짝 유해졌다. 어쩌면 정말 다정한 사람일지도 몰라. 혹은 너무 심심한 사람이라거나.

옆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룸메이트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이 사람 어떤 것 같아요? 제 장기 털어갈 것 같아요?

언니는 그가 카페에 올린 글을 뒤져보라고 했다. 오호. 역시 여행 많이 다녀온 사람 말을 들어야 해. 다행히 그는 2년 전부터 꾸준히 동행을 구해서 여행을 떠나는,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동행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살짝 안심이 되어 한 숨 돌렸다.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을 했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까지도 들었다.

쳇, 누가 그렇게 착하래?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나는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차를 타면서도, 인스부르크에 내려 그에게 연락을 하면서도, 만나서 차에 타기 전까지도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 문을 열자,

동글동글 귀여운 안경을 쓴 두 남자 등장. 회사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안전해 보여.


그렇게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충격적인 건 그들이 정말 같은 계열사 동료였던 것. 나 혹시 관상을 볼 줄 아는 건가? 우선 신원은 확보되었으니 두 숨 돌렸다. 그 둘이 이미 친한 사이이기도 하고, 같은 계열사로서 공감대도 많아서 편하면서 재미있었다. 분명 엄청나게 깔깔거렸는데 돌이켜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소소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던 것 같다.


두 시간이 흘러 도착한 알프스 산 입구. 지금부터는 등반을 해야 했다. 거의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올라갔는데도(운동하는 남정네들 따라잡느라 죽는 줄 알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에 골이 어질어질했다. 등산은 늘 나를 괴롭게 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 산마다 다른 것 같아도 다 똑같다. 곧 정상일 것처럼 해놓고 알고 보면 아직 시작도 안 한 게 바로 그 방식이다. 어쩜 매번 속는다.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30분을 넘게 계단을 올랐을 즈음에 지쳐 주저앉았다가 하산하는 독일인 부부가 있어서 물어봤다.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그들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1시간 반은 가야 된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라고 한국말로 말했다. 못 알아들으셔서 다행이었다. 독일인 부부와 수다를 떠는 척 쉬고 있으니 옆에서 동행이 빨리 가자고 재촉해서 어쩔 수 없이 절망의 계단을 이어 올랐다.

절반정도가 지났을 때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꼭, 꼭, 끝까지 가야 할까? 그럴 때마다 열심히 마음을 다스렸다.


‘노력은 좋은 거야. 노력은 좋은 거야.’


뭐가 좋은데. 노력이 왜 좋은데. 끊임없이 반발심이 들었지만 나를 달랠 수 있는 건 나뿐이니 더 다스릴 뿐이었다. 노력은 좋은 거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은 거야. 하며.


그렇게 눈앞의 계단들을 해치우다 보니 정말 정상에 도착해 버렸다. 야-호. 정상에 있는 산장에서 맥주를 팔고 있었다. 지나칠 수 없었다. 하루종일 굶은 채로 완등을 하고 오후 한 시에 마시는 맥주. 또 침이 고이려고 한다.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유럽에 와서도 맥주는 거의 안 마셨는데, 완등한 나에게 멋스러운 선물을 주고 싶었으니까 도전해 봤다. 유럽 맥주 다르다더니,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맥주 맛이 별로 안 나고 레모네이드 맛이 강했다. 나는 그래서 맛있었던 건데 동행들은 맥주에 감히 향료를 넣어? 하고 발끈했다. 이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싫다니. 모든 사람들의 입맛은 제각각이구나. 나를 이 멋진 곳까지 데려와준 것에 대한 감사표시로 맥주는 내가 결제.


이곳에는 정상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 스팟이 있다. 우리도 거의 한 시간가량을 기다려서 찍었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등반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모두 천천히 기다려주는 듯했다. 열정적인 사진 촬영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하산. 여태까지는 힘들어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지만 막상 살만해지니까 꼬르륵 소리가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미 세시였다. 얼른 내려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위태위태한 돌산을 급히 내려가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한 번쯤 넘어질 줄 알았다. 엉덩방아를 찍는 그 짧은 순간에 이럴 줄 알았어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엉덩방아를 찍는 요란한 소리에 앞에 걸어가던 여성이 급히 뒤를 돌아 손을 내밀어주었다. 감동이야... 손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방금 내가 낸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급히 뒤를 도니 또 다른 여성이 넘어져있었다. 나와 내게 손을 내밀어준 여성이 함께 손을 내밀어 그 여성을 일으켜주었다. 우리는 그 순간 동지가 되었다. 우리 셋, 모두 고생 중이야.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고, 조심하라는 듯 눈 맞춤을 하고 난 후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산 밑에 내려와 차에 타니 다섯 시였다. 배는 고팠지만 식욕은 없었다. 이미 마음속이 성취감으로 든든했달까. 그런 것 치고는 세 명이서 메뉴를 다섯 개 시키기는 했지만. 동행들은 끝까지 나를 배려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는 지하철역으로 데려다주어서 한 시간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작별.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좋은 추억만 남기고, 다음을 기약하지는 않는, 아쉬우면서도 충만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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