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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락방 Aug 06. 2024

비에 젖은 추억 한 꾸러미

우리들의 아지트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자연이 최고의 놀이터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산으로 들로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 쫓아다니기 바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리 동네에는 아지트 만들기가 유행했다. 끼리끼리 노는 무리마다 자기들은 아지트가 있다며 자랑하기 시작했고 나도 질세라 유행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팀은 산기슭 아래에 나뭇가지를 엮어 집 형태를 만들고 비닐을 주워다 씌웠다. 바람에 비닐이 날아가지 않도록 무거운 돌로 아지트 주변을 빼곡히 둘렀다. 제법 형태를 갖춘 아지트는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포근한 느낌이 났다. 우리만의 아지트가 완성됐다고 이제 자랑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리더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지트 내부도 잘 꾸며야 한다며 각자 집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집으로 가서 장롱 안에 있는 이불 한 채를 들고 아지트로 향했다. 오빠 언니들은 나를 보더니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누구는 돗자리를 가지고 왔고 누구는 간식거리를 챙겨 왔고 또 누구는 만화책을 들고 왔다. 텅 빈 아지트가 조금씩 채워질수록 우리들의 결속력도 강해졌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아지트는 좌로 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우리는 끊임없이 아지트를 보수해야만 했다. 금세 아지트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아이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하나둘 자기가 가져온 물건들을 챙겨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져간 깨끗했던 이불은 누더기처럼 변했고 그제야 걱정이 되었다. 하필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아지트로 향했고 우리들의 아지트는 밤새 내린 비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누더기 같던 이불은 보이지 않았고 흙탕물 범벅이 된 이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이불을 어떻게 집으로 들고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질척이는 흙길을 따라 이불을 이고 가다가 그만 엄마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란 엄마가 소리쳤다.

 “그게 뭐꼬?”

 “엄마, 있잖아. 이불이 우짜다가 이래 되어버렸다. 미안해. 내가 다 빨아 놓을게.”

 “으이구 가스나야. 어쩐지 장롱이 허전하다 했다. 그거 세탁기에 넣지도 못한다. 빨간 다라이에 담아놔라.”


엄마의 불호령은 있었지만, 등짝 스매싱은 피할 수 있었다. 커다랗고 빨간 고무통에 이불을 넣고 수돗물을 콸콸 틀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빨간 고무통이 누런 흙탕물로 가득 찼다. 바지를 걷고 통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꾹꾹 밟았다.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흘렀다. 이불을 밟을 때마다 흙이 퐁퐁 새어 나왔다. 무더운 여름날 물놀이를 실컷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빗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이 온몸을 적셨다. 한참 동안 이불을 꾹꾹 밟았건만 흙탕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지치기 시작한 나는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를 잡고 마당에 물을 뿌리며 놀기 시작했다. 어차피 비가 왔으니 마당은 젖어있었다. 깨끗한 수돗물이 마당에 쫙 뿌려질 때마다 내 마음도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수돗물을 펑펑 쓰다 결국 엄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조금 전 피했던 등짝 스매싱을 이번에는 맞고 말았다. 그리고 듣고야 말았다.

“가스나가 와 이라노? 감기 걸린다 어여 집에 들어가라.” 

안방 창문 너머로 부지런히 이불을 밟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빨래 세제를 넣은 건지 빨간 고무통이 뽀얀 비누 거품으로 가득 찼다. 순간 저걸 내가 해야 하는 데 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엄마, 나도 그거 해보면 안 돼?”

“시끄럽다, 감기 걸리니까 언능 목욕하고 머리 말리래이.” 

더는 묻지 못했다. 다음 날 빨랫줄에 걸린 뽀얀 이불을 발견했다.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비가 오면 엄마가 부탁하지 않아도 빨래를 걷어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때 그 시절. 또르르 떨어지던 빗소리도 마당으로 콸콸 쏟아졌던 수돗물 소리도 추억이 되어 나의 귀를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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