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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밀 Sep 08. 2023

아주 전형적인 우울증입니다

진단을 받으니 차라리 속이 시원해졌다.



“아주 전형적인 우울증입니다. 꾸준히 약 드시면 확실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끼실 거예요.”


죽고 싶다고 생각한 지 12년째가 되던 2022년의 늦가을, 의사의 한 문장으로 애써 외면해 온 우울증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죽고 싶었던 걸까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열두 살 때가 처음이었어요. 친했던 같은 반 친구들 무리로부터 왕따를 당했거든요.


당시에는 반에 여러 무리들이 있었고,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혼자 생활하는 애들을 왕따라고 놀리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왕따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혼자 등교하고 점심을 먹고 하교하던 어느 날, 책상 서랍에 있는 편지지를 한 장 부욱 뜯어 맨 윗줄에 ‘유서’라고 적었던 기억이 나요.


쓰고 싶었던 내용은 정말 많았지만 ‘유서’라는 글씨 밑으로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빈 집에서 눈물만 뚝 뚝 흘리다가 고이 접어서 제일 가까운 책꽂이 구석에 꽂아 두었어요. 언제든지 다시 마음을 먹으면 쓸 수 있게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제가 안쓰럽습니다. 만 열 살의 아이가 얼마나 살아봤다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걸까요?


왕따를 당하던 기간 동안, 정확히 언제 어디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감정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주된 감정은 내 잘못으로 왕따가 되었을 거라는 자책이었습니다. 내가 소심해서, 먼저 살갑게 다가가지 못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나의 어떤 행동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고 심기를 거슬렀으며 결과적으로 나를 싫어하게 했는지 항상 생각했습니다.


모든 행동과 발언을 검열하고 의심하며 더 위축되었고, 위축은 또다시 자기 의심과 자기혐오를 낳으며 부정적인 순환을 만들었습니다.


따돌림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책하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주동자를 향한 강한 분노도 매우 강했습니다.

그 아이를 해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여러 번 상상하기도 했으며, 아무런 후회와 죄의식 없이 상상한 것을 이행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과도한 자기혐오와 잘못된 분노의 표출 방식. 그 무엇도 초등학생에겐 적합하지 않은 감정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성격도,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도 무척 소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매년 달라지는 반 아이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다시 버려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 매일 매 순간 위축되고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판기에서 무슨 음료를 마실까 고르듯, 저녁 메뉴를 고르듯 아주 일상적으로 ‘아… 죽고 싶다. 죽어야 하는데. 언제 죽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자아가 형성되던 시점부터 저는 항상 죽고 싶었거든요. 친해져서 속마음을 나누게 된 친구들과도 이야기해 보면 이런 생각을 다들 한두 번씩은 해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생각하며 사는 줄 알았어요.


숨 쉬듯 자연스럽던 자살 욕구는, 고등학생이 되고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맺은 3명의 친구들이 생겨나면서 아주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들과 만난 건 따돌림 경험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넷이서 함께한 시간의 양만큼,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던 나 자신이 안정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들과는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편안하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이 세 명의 친구들이 있어서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은 18살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제게 이걸 알려준 사람은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반 친구였어요.


펑범하게 수다를 떨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때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제 머릿속에 있던, 제겐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었던 자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던 것 같습니다. 제 얘기를 듣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뭐라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저는 믿지 못하고 친구에게 거듭 물었습니다.


“한 번도? 고등학교 2학년까지 살면서 정말 한 번도 없어?”


정말 없다고, 너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고 살면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죽고 싶은 게 힘든 건지도 모르고 6년째 살아와서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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