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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Jun 10. 2024

셋째는 처음이라..

My first time having a third-born child.

아이가 세명이라고 육아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박사과정 마지막을 달려갈 무렵 셋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둘째 임신했을 당시에는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시기여서 사실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셋째를 임신했을 때는 거의 자포자기였고 '될 대로 돼라'였다. 어떻게 보면 헤쳐나가겠지라는 믿음? 의지? 가 있었던 같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 어린이집까지 보내는 사이클을 모두 겪으며 박사과정을 하던 나에게는 '내성'이 생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둘째 아이가 생겼다고 교수님께 처음 말씀드렸을 때 나의 건강상태를 먼저 물어봐주시던 교수님의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아무래도 아이가 있던 학생도 내가 처음이었고 박사과정 중에 임신을 한 학생도 내가 처음이었기에 너무 놀라셔서 잠시 넋이 나가려는 것을 다시 부여잡으시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공존하였다. 나였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육아휴직을 주셨고 나에게 한 달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2주간 조리원에서 열심히 조리를 받고 산후도우미 분께서 집으로 오셔서 아이와 나를 케어해 주셨다.


처음 미국에서 갓 출산하고 땀 흘리는 나에게 차가운 오렌지 주스와 우유를 건네던 미국 산부인과와는 다르게 한국인 산모의 몸상태와 입맛을 고려한 식단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유는 조건이라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아 모유가 터져 콸콸 나올 때까지 처음에 고생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산모 위주였다. 모유수유도 선택이었고 조리원에서 밤 수유는 열정이었다. 나는 새벽에도 수유콜에 항상 응했고 조금(사실 많이) 피곤했지만 그래도 우리 예쁜 딸과 만날 생각에 항상 행복하게 수유를 했었다. 집에 돌아와서 도우미 분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씻기는 방법 등도 배우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받고, 한국은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에게 감지덕지한 한 달이라는 육아휴직이 지나갔고 힘겹게 연구실로 복귀를 했다. 밤에도 두 번 세 번 깨던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계속할 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성애보다는 나의 수면욕이었던 것 같다. 분유를 타기 위해 일어나서 고군분투하는 시간보다 얼른 젖을 물려 모유를 주는 게 더 빠르고 덜 피곤하다는 결론은 이미 조리원에서 나있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나의 두 번째 출산이 잊혀 갈 때쯤 셋째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그렇게 셋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다시 교수님께 알리던 날, 교수님은 놀라지도 않으셨고 활짝 웃으시며 너무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이번에도 육아휴직은 한 달이면 되겠지?"

"어휴, 그럼요! 충분합니다!"


당당하게 말씀드렸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한 달이라는 육아휴직이 아니라 세명의 아이의 엄마가 되기에 '나는 충분한 사람인가?' '나는 자격이 있는 어른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었던 것 같다. 결혼도 만 25세, 꽃다운 크리스마스 같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첫째 아이도 20대 후반에 막 들어섰을 무렵 출산했으며 둘째도 모두가 조심한다는 29세의 아홉수 나이에 출산했으니 내 또래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려웠다. 둘째 아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행복과 함께 공존하던 두려움의 딱  3의 3 승배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모두가 어떻게든 살아가 듯 나도 어떻게든 해내고 있었다. 조리원에서도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여서 그런지 미리 수유해서 신생아 케어 조리사 분들께 부탁드리면 밤 수유는 열정과 패기로 나의 몸을 혹사하지 않아도 됐었다. 어차피 조리원 나오면 피곤할 예정이니 최대한 에너지를 보충하자라는 나의 이성세포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에너지와 영양소를 충분히 보충하여 조리원을 퇴소하고 출산 후 3주 차가 되면 몸도 슬슬 찌뿌둥해졌고 다시 복귀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셋째 아이를 출산할 때도 젊었었던 것이다. 그래서 4주 차에는 연구실에 가끔 출근해 다시 실험 준비도 하고 나의 배다른 자식들인 암세포 배양도 다시 시작했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한 달이라는 육아휴직은 모두에게도 충분하다는 것으로 연구실에서 기정사실화 돼버렸다. 이 부분은 후에 박사과정 중 임신할지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째를 임신했을 때와 셋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기에 행복했지만 두려움도 같이 공존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명의 아이를 기른다는 것과 세명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임을 지금은 확실히 몸소 느낀다. 적어도 아이들과 함께 잠드는 나에겐 은 두 뿐이라 두 명에게는 팔베개, 셋째 아이에겐 다리베개 밖에 해줄 수 없으므로...


나와 같은 길을 밟을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후배들과 그리고 셋째 아이에게 미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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