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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Jul 23. 2024

붉은 옷의 여인

Lady in Red


Lady in Red

Chris DeBurgh의 Lady in Red라는 노래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86년 6월에 나온 곡이다. 이 곡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입학 후 9학년에 들은 English as Second Language (ESL)라는 영어 수업에서 인데 아직까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미국에서는 선생님을 부를 때 'teacher'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은 그렇게 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중학교부터 미국생활을 시작했던 내 기억으로는 보통 선생님의 last name (성)을 Mister(남자 호칭)이나 Miss(여자 호칭) 뒤에 붙여서 부른다. 내가 수강하던 ESL 수업의 선생님은 Mr. Fernandez였다. 뽀글 머리의 키가 큰 중년 남성이셨는데 인상이 참 좋으셨다. 우리 학교는 LA district(구역)에서 API (Academic Performance Index)라는 학교자체의 성적표와도 같은 지수가 기준 80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520을 보유하고 있는 학군이 안 좋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게다가 전교생이 4,000명이 훌쩍 넘고,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었으며, 학생들 중 65%가 넘는 비율이 임신이나 가족문제, 흡연, 마약등의 이유로 중퇴를 하였다. LA 통합교육구 전체에서 하위 96% 였던 우리 고등학교는 꼴찌를 다투는 학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겠다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았다. 그중 한 분이 Mr. Fernandez였다. 항상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셨고 학생들에게도 항상 따듯하게 말씀하셨었다.


이 수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daily journal(일기) pronunciation activity(발음 활동)다. Daily journal은 학생들에게 매일 일기를 적게 하셨는데 자유롭게 그날 있었던 일을 적고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영어로 표현하는 활동이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영어로 일기를 이미 쓰고 있었지만 내 생각과 느낌보다는 그날 있었던 일에 집중해서 썼기 때문에 daily journal을 쓸 때 항상 고민하면서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상대방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깊게 관찰하고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힘들었다. 또 단순히 '무언가를 했다'가 아니라 그 행동과 생각들을 디테일하게 영어로 번역하여 작성하려니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 활동에 익숙해지니 나중에 표준 영어반이나 다른 수업에서 리포트나 작문을 할 때 훨씬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어서 많이 도움이 되었고, 한국어로의 생각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짧은 글이나 일기라도 꾸준하게 몇 년을 쓰다 보니 에세이 형식의 글 흐름이라던지 구성(인트로-본문-결론)도 깔끔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사고였다. 점차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다. 마치 모국어가 영어였던 사람처럼.


발음 교정을 위한 활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Mr. Fernandez는 학생들에게 한 장의 노래 가사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몇 날 며칠을 그 가사들을 완벽하게 발음하여 교실 앞으로 나가서 읽는 시험을 보게 하셨다. 거기에다가 외워서 노래까지 같이 부르면 추가 점수와 초콜릿이나 사탕등 간식도 주셨다. 당시에 나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조용한 아이여서 발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었다. 방과 후에 길거리로 나가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나, 영어 수업시간에 친구들 앞에 서서 노래를 하며 발음 시험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빨리 영어를 배워야 했고, 상상할 수 없던 일은 곧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ESL 반이라고 해도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고 95% 이상의 학생들은 스페인어권 국가 출신 이주자인 Hispanic(히스패닉)이었다. 스페인어와 영어는 모두 알파벳으로 이로워져 있고, 어순도 같으며, 40% 이상의 단어들이 비슷한 스펠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친구들 대부분이 비영어권 국가 출신이었지만 금방 영어에 익숙해지고 빠르게 터득하는 편이었다. 아마 내가 반에서 영어를 가장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친구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었다. 노래였다.


'그래, 부족한 점수는 노래를 해서 추가 점수를 받자.'


물론 가수 같은 노래 실력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성가대도 했었기 때문에 음감은 어느 정도 있어서 박자와 음은 잘 맞춰서 부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Mr. Fernandez는 단지 학생들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추가 점수를 주면서 까지 아이들에게 노래를 권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영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 이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하며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는 비영어권 학생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고, 그 용기를 낸 사람에게 달콤한 treat인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좋은 성적이라는 큰 포상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회사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면서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요즘 노래는 아는 것이 없어서 학창 시절에 즐겨 듣던 조용한 발라드나 신나는 팝송을 듣곤 한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내가 ESL 수업을 들을 때 배웠던 Lady in Red 외 다양한 명곡의 팝송을 들으며 당시 추억을 회상한다.


Mr. Fernandez: Guys, you need to sing this song while you think of yourself as the man asking the lady in red dress to dance with you. (얘들아, 이 곡은 너희가 마치 이 노래 속 남자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게 같이 춤춰달라고 하는 상상을 하며 부르는 거야.)

Student: Mr. Fernandez, what if you are not a man? (만약 제가 남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요?)

Mr. Fernandez: Then, think of yourself as that charming lady in red and pretend someone asks you to dance with him. The point is to be brave and confident just as you are the protagonist of your life. (그러면 네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남성이 너에게 춤추자고 한다고 생각하고 부르렴. 여기서 포인트는 용감하고 자신감 있게 해야 한다는 거야. 너의 인생의 주인공은 너인 것처럼.)


나는 그 노래의 여주인공처럼 클러치와 함께 붉은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 대신 하얀 가운에 파이펫을 잡는다.

Lady in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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