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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Mar 06. 2023

그 남자의 BGM (1)

80번 소개팅의 전말

용 부장은 아침에 출근해서 매일 지각하는 나를 모가지가 빠지게 기다렸다. 지각했다고 뛰지도, 잰걸음도 없는 내가 올라오기를 햄스터마냥 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면 지문인식 출입문을 안에서 먼저 철커덕 여는 식이었다.


 어제 정 과장 집에 갔었어? 응 응? 뭐 먹었어? 데이트는 얼루 갔어? 어우, 집도 왠지 잘해놓고 살 것 같아. 사람 원체 깔끔하잖아. 둘이 그렇게까지 잘 맞을 줄은 몰랐지이.


용 부장은 내게 정 과장을 소개하고 꽤나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오지랖이 넓은 그녀는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쓰럽게 여겼고, 싱글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사 사람들이 남아있는 자투리 중 아무거나 갖다 붙일 땐, 나보다 더욱 속상해했다. 예전에 거래처 변 소장이 내가 만날만한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50대다라고 말했을 땐,


 소장님, 소장님 드디어 미치신 거 아니에요? 기쁨 씨 아직 서른여덟이에요!


하고 용 부장이 더 발끈해 소리를 질렀으니. 고맙기도 한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저 여자가 위하는 척 맥이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정 과장을 소개했다. 소개라고는 하지만 정 과장은 내가 입사할 때부터 이미 들이댈 체비를 하고 있었다. 메신저로 업무 관련 쓸데없는 질문을 보내고 내가 하나마나한 답변을 하면 고맙다며 "주성이와 삼겹살 먹기 쿠폰"하면서. 돼먹지 않은 아양을 떨었던 걸 그쪽 지사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때는 남친이 있었다. 버젓이 메신저에 커플사진을 띄워놨음에도 불구, 정 과장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쓸데없는 질문을 해댔다. 용 부장이 한 일은 지난 행사 때 내게 알은척 하기를 주저하는 정 과장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키고 샴페인을 따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모든 게 다 본인 덕이라는 식으로 굴었다. 잘됐으니 밥을 사라지를 않나, 정장을 사라질 않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 이 양반아.


정 과장은 메신저상에서 보이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은 어디로 날려보낸 건지. 연애 초반에는 내 눈을 보지 못해 벽이나 쳐다보고 애꿎은 카드지갑이나 주물럭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농담을 하고 귀여운 척을 하며 케이크를 와구와구 먹기도 하고 내 눈앞에서 태연의 INVU 춤을 추기도 하고 난리였다. 철없게도 재미없는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주던 나는 의외로 웃긴 정 과장에게 빠른 속도로 정을 붙였다.


 




주성이 익숙한 동작으로 현관을 열자 신발장 옆 스툴 위 캔들 워머에서 초가 노랗게 녹고 있었다. 거기서 인공으로 만든 허브 향이 퍼졌다.


늙은 아파트였음에도 그 집엔 먼지 한 톨, 곰팡이 한 점이 없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발을 씻고 나와 집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집엘 가면 그 사람의 외형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있는 작은 행거에는 평소에 그가 입고 다니던 셔츠들이 색깔별로 가지런히 걸려있었고 투명한 유리 장에 시계와 팔찌들이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매우 넓은 원룸이었는데, 그는 높은 엔틱 장을 세우고 그 옆에 에스닉한 큰 천을 천장에 걸어 공간을 분리해 살고 있었다. 비어있는 벽의 곳곳에는 그가 미국에서 생활할 때 플리마켓에서 사 모은 그림들이 걸려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청록이나 핫핑크 같은 직관적인 컬러의 오일바 드로잉이었다. 나는 그의 집에 다녀오고 나서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이 집은 자가예요 전세예요?

 월세.


예상했던 것보다 대답이 별로였지만 그래, 그게 뭐 어떤가. 결혼하면서 전세로 옮기면 되고, 처음부터 넉넉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우린 아직 젊은데. 무엇보다 그 집엔 먼지 한 톨 없지 않은가. 우리처럼 잘 정돈된 사람들이라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곧- 훨씬 더 좋은 장소로 나아갈 수 있겠지.


나는 주성이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이 잘생겨서 만났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건 그 나이에도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고 입술 모양이 뚜렷하고 풍성한 건, 말년이 좋고 속이 좁지 않은 관상이라는, 미신이 오랫동안 굳은 에서 오는 충족이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 중 극히 일부분이었으나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몇 십 년을 쉬지 않고 연애했는데, 이제 와서 누군가 때문에 설레 잠도 못 자고 그의 팔에 들러붙어있다 못해 아예 꿰매버리고 싶다면. 사지 묶고 어디 들어가야지. 내가 새삼 그런 낌새를 보인다면 가까운 119에 신고해 주길 바란다.






우리의 연애는 순탄했다. 더 보태서 순탄했으며 안정적이었다. 주성은 내가 그동안 만났던 어떤 사람들보다 우리들의 관계에 성실했기 때문에 이제야 제대로 된 팀원을 만난 기분이 들게 했다. 일에 있어서도 나는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나보다 5년이나 먼저 이 회사엘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에 관해서든 실무에 관해서든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사적인 생활에서도 그는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나와 연애하기 시작한 즉시, 술을 마시거나 골프를 치며 인맥을 넓히던 모임에서 탈퇴했다. 내가 필요에 의한 모임에 나가도 좋다고 말했으나 술모임이라 매번 유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자신의 애인으로서 괜한 의심도 불안도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틈이 나는 대로 우리 사무실 앞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가고, 가능하면 저녁에도 와서 함께 식사하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주성은 2년 안에는 같이 살고 싶다며 집을 사겠다고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다. 차량의 키로수가 내가 없던 시기보다 세 배는 늘었으니 나는 매일 북돋는 말로 그를 채워주었다. 우리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기운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말마다 맛있는 걸 먹으러 다녔다. 깔끔한 게 좋아서 웬만하면 조리과정이 눈에 보이는 식당을 선호했고, 음악소리보다 조리하는 소리가 더 큰 곳으로 찾아다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비닐 막 안에서 곰장어를 구워주는 곳엘 갔고 맑은 날에는 옥상에 오색의 차양을 드리운 곳으로 갔다.


둘 다 볼과 배에 살이 포동포동 오른 모습으로 강릉에서 커피빵을 먹고 있던 어느 날 주성이 내게 생년월일시를 물었다. 그 집 어머님의 오더였다. 그녀가 명리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성아. 난 사주 안 믿어. 왠지 않아?

 

 교회 다니니까 그런 거 아냐?


 아니. 물론 그것도 맞는데. 난 사주상으로 지금쯤 영부인이 되어있어야 하거든. 내 사주는 거의 완벽하다고 했어. 내 엄마가 나 어릴 때 명리학 했었거든. 엄마도 내가 별이 될 팔자라고 했고, 뭐 스님이며 교수들이며 내 사주가 엄청나다고 했던 걸 귀가 따갑도록 들었단 말이야? 근데 지금 나 봐바. 나 걍 일반인이구, 이렇게 정주성이랑 시시덕대고 있잖아.


 모르지. 내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잖아. 아······. 정치는 내 취향 아닌데. 먹는장사로 백종원 아저씨 이겨버려?


주성의 어머니는 내 사주를 알자마자 그에게 전활 걸어 얘는 얼굴 안 봐도 합격이다.라고 말했다. 얘가 네 팔자에 금칠을 할 궤이니 꽉 잡으라고 했다는 말도. 나는 과연 사주 따위로 남의 인생에 금칠할 수 있는 건지, 그런 경솔함으로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는 때때로 함께 취하고 싶어 했다. 주성은 맨 정신엔 의미 있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아서 사실은 내 쪽에서 주성에게 술 먹이기를 좋아했다. 그러고 나면 주성은 진실의 알약이라도 받아먹은 것처럼 일하면서 있었던 이야기, 가족사, 첫사랑 이야기 등등 쓸개에 짱 박혀 있던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냈다.


그날 우리는 그의 친한 형이 추천한 인천의 후미진 곱창골목에 있었다.


뭐든 굽기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그날도 집게와 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취하지 않았다. 한참 열중해 대창을 뒤집고 있는데 볼이 붉어진 주성이 뜬금없이 맹세하듯 이렇게 말했다.


 기쁨아, 나 어제 강 대리랑 약속했다? 이제 더 이상 마사지 받으러 안 다닐 거라고. 나한텐 너가 생겼잖아.

 

 무슨 마사지?

 

 아. 스웨디시라고. 유럽식 마사지야.

 

 그게 왜? 마사지 좋잖아. 피로도 풀리고. 다음에 같이 가자.

 

 피로 풀리지. 특히 서혜부 쪽으로. 아니야. 아냐. 이제 난 안 다니기로 했어. 근데 어제 강 대리가 그러더라. 열받게. 개가 똥을 끊지 하면서. 하하하. 안 가 안 가 난, 이제 절대.


곱창집은 너무 더웠고, 시끄러운 만큼 연기가 자욱했고, 술도 좀 마셨고. 그래서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BGM이 OO인 남자(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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