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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Oct 05. 2023

늙은 싱글의 명절 증후군 2

 오늘도 겨드랑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지만, 확실히 가을의 햇빛은 다르다. 노랗게, 설탕을 녹인 물처럼 쏟아진다. 그럼에도 마음의 맛은 쌉쌀해서 지극한 이질감이 드는 거다. 그게 환절기마다 불편하다.


이번 추석에도 큰아버지는 어김없이

 야 인마, 넌 결혼은 안 하냐? 남자도 없고? 멀쩡한 애들이 왜들 그래에?

했다.


지난 설에는 그런 말들에 소름이 끼치더니. 안에서부터 전기가 일어 머리카락 끝에서 파스스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엔 별 느낌이 없다. 오히려 이번엔, 지나치고 까맣게 늙어버린 큰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얼굴은 비쩍 말르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버린 큰아버지는 이제 힘도 없어 아예 문명과 떨어져서 지낸다. 명절마다 싱글들에게 결혼은 안 하냐 기혼자들에게 애는 안 낳냐 하는 질문에 값을 매긴다는 걸 그는 모른다. 도대체 그렇게 늙어가는 기분이라는 게 뭘까. 아이돌 음악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그 기분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으. 고모 벨소리야? 촌스러워. 벨소리 겁나 오랜만에 들어.


 뭐. 왜.


 고모, 요즘 MZ들은 벨소리 안 해요. 진동으로만 해놓는다고. 난 내 벨소리 뭔지도 몰라. 워치 없어?


 안 차고 왔다. 별, 어휴.



이런 기분이구나.




우리 집안은 여전히 홍동백서를 지키며 나무제기로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다. 할아버지는 100세의 몸으로 자기보다 어린 조상들에게 절을 하며 그들의 이름을 썼던 종이를 한 장 한 장 태우는 그런 집. 행여 조상들이 못 들어올까 온 창을 다 열고 향을 피우는 그런 집. 그러면서 모기장은 왜 안 여나, 확실히 조상보다 초가을 모기가 무섭지. 조상은 결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잔인한 진실을 믿는 나. 그들은 그 진실을 마주하면 어떤 얼굴이 될까.


무릎에서 꾸덕꾸덕 관절이 굳어가는 소리를 내며 절을 하는 그들을 멍하니 보면서 나는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이별한 그 사람을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고 양치를 해야지, 어떻게 양치를 하고 담배를 피워? 최소한의 매너는 좀 지키자.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원래 다 이래.


 너나 그러지 누가 그래. 난 그런 사람 못 봤어. 왜 자꾸 상식에서 어긋나는 말을 해?


 상식이 문제가 아니라 넌 그냥 내가 싫은 거야.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표현해서 싫은 것. 시간이 갈수록 콩깍지가 벗겨지는 시기는 앞당겨지고, 몰랐던 집안 사정, 눈에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짐, 그런 것들을 알아가면서 나는 행여나 그 짐이 내게 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내 생각을 가장 잘 아는 나는 내가 싫어진다. 동반자는 무거운 것을 함께 짊어지는 거라던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일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면서 산다. 내년은 올해보다 좀 더 낫겠지. 시간이 갈수록 더 나아지겠지.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

그러나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 인격적여지고 온화해진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절제를 기억하지 못해서 본능이 더 세어지고, 천박한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아도 어련히 상대방이 참겠지. 못 참으면 다툼 그까짓 거.


더 나아질 것 같던 그 모든 것이, 오해로 남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제사가 끝나고 제기를 닦고, 또 아침상을 얻어먹고 설거지를 했다. 전날 와서 음식 준비를 돕지 않은 사람의 비실비실하게 남은 양심. 설거지를 끝내고 식기 세척기에 그릇들을 엎고 손을 털 때 사촌언니가 와서 말했다.


 야 이 미친년아. 그릇을 이따위로 얼기설기 엎어? 야 뒷손이 안 가게 해야 될 거 아냐 미친년이 진짜. 야 봐라. 이렇게, 이렇게 해놓으면 자리가 이렇게 남잖아.


 자리 남음 뭐. 더 씻을 거 없잖아. 그리고 언니, 식기세척기는 원래 얼기설기해놔야 더 깨끗하게 씻기는 거야.


 미친년 따박따박 말이나 못 하면.


 말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집에 돌아오니 창으로 노란빛이 들어와서 책장을 비추고 있었다. 햇빛에 책등이 색을 잃어가는 게 싫은데도, 그 자리를 택했다. 그 앞에 꼭 테이블이 놓고 싶어서 그 자리를 택했다. 커피를 내려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앞에 엎드려서 어수선하게 꽂혀있는 책들을 봤다.


 2주 전, 책을 다 빼서 바닥에 내려놓고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미처 그것들을 꽂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왔다.


 자기야 저거, 책들 좀 책장에 꽂아줘. 시간 없어서 닦기만 하고 못 꽂았어.


 오자마자 또 숙제를 주시는군요.


 무슨. 난 너 먹이려고 요리했잖아. 팔목 아프단 말이야.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 섰을 때, 책들은 제멋대로 꽂혀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씻으러 들어간 뒤였다. 장르는 당연히 뒤죽박죽이었으며 어떤 책은 책 등이 아니라 낱장이 보이게끔 꽂혀있었고 어떤 책은 책날개가 삐쳐 나와 있었다. 어떤 책은 위아래가 뒤집혀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들어간 욕실 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꽂으면 책 제목은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물구나무를 서서 읽으란 건가······.


몇 주가 지났지만 나는 그가 꽂아놓은 책들에 전혀 손대지 않았고 질서가 없어도 여전히 노을이 비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때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뭐야. 물구나무를 서서 읽으라는 건가······.


입이 웃었는데 눈물이 주룩 하고 떨어졌다. 누가 있지도 않은데 창피해서 얼른 얼굴을 닦고 일어섰다.


잠시였던 것 같은데 커피가 다 식어서 싱크대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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