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
나에게도 팀이 생겼다. 평생 팀이라고는 조별과제, 아니면 소속 부서가 전부였기에 사적이고 낯간지러운 사이가 굉장히 수줍었다.
누가 ‘그럼 소속 팀 같은 게 있는 거야?’ 하고 물으면 연애 시작한 사람처럼 뭐라 답하기 부끄러워 말끝을 흐린 적도 많다. 아이그냥뭐. 그냥. 하핫.
우리는 매주 함께 발을 맞췄다. 뙤약볕 아래서 손톱보다 작은 얼음이 떠 있는 것도 얼음물이랍시고 다 같이 나눠 마셨다. 동장군이 오면 자신의 장갑과 외투를 나보다 조금 더 벌벌 떠는 이에게 기꺼이 양보했다.
생김새는 제각각이면서 팀 유니폼만 입혀 놓으면 같이 나고 자란 쌍둥이 자매들 같았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
정 주고 적응하는 속도만 빨라 그렇지, 까놓고 말해 태어나서 공을 발로 차기 시작한 지 약 두어 달 된 왕초보 그 자체였다.
공 받는 건 고사하고, 이렇게 뛰다간 폐 한 군데가 펑 터지는 게 아닌지(이지경까지 되면 어지럽고 춥기까지 함) 두려웠다. 시간이 짧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사경을 헤맸다. 집 가는 길에 매번 '진짜 심정지 온 사람 없어요? 아직 없는 건가?' 캐물으며 미처 발달하지 못한 신체를 이 악물고 부정했다.
이런 어설픔이 꼭 '언니 친구들 노는 데에 눈치 없이 따라온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튀기 싫어도 연신 흐름을 끊어대니 튈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시간을 버틴다는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언니들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어린 동생이었단다. 사이드스텝으로 기어 나와, 응애 대신 내려와! 외쳤을 듯한 고인물들도 눈칫밥을 피할 수 없었단다. 그러면서 오로지 시간과 노력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더라고, 연습만이 유일한 길이자 지름길이라며 조언했다. 참, 말은 쉽지.
라고 생각했으나 팀원들은 그 어려운 걸 곧잘 해냈다. 미숙한 나를 위해(일단 본인들이 개인 연습을 즐기는 것도 사실) 사계절동안 자신의 시간을 선뜻 빌려줬다. 따로 모여 개인 연습을 도왔고, 초보자가 한계에 부딪혀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가장 정성스러운 방법을 써 가며 노력을 나눴다. 보답하는 방법은 즐기며 성장하는 것뿐이었다.
리프팅 세 개 해낼 때까지 집에 못 간다는 말에 울면서(눈물 나는 게 정상이라며 계속하랬다) 공을 찼다.
남들은 서른 번도 곧잘 차는데, 나는 백 번을 차기 위해 백한 번 숙여가며 공을 주워야 하는 상황이 화가 나 씩씩거렸다. 그러면 욕도(나오는 게 정상이라며 계속하라고)했다.
패스하나 제대로 못 받아서 공이 오는 자체만으로 두려울 때에는 사방팔방 흘러간 공을 직접 주워와 계속 찔러주었다. 내 발 끝에 공이 맞을 때까지. 나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멘탈이 무너질 땐 ‘더 쉬운 운동을 할걸, 왜 사서 개고생을 하나!’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별을 고하려는 사람처럼 사색에 잠긴 채 귀가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러면 누가 몰래 귀띔이라도 한 것마냥 귀신같이 '오늘 정말 멋있게 잘 해냈다'며 손바닥보다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칭찬보다 구체적이고, 애정보단 가볍고, 친근함보다는 깊고 따뜻한 응원들이었다.
그렇게 매주 파릇한 새싹과 푹 데친 우거지를 오가던 나약한 즙짜개는 사춘기를 이겨냈다. 이제는 리턴도 줄 줄 알고, 공을 소유하는 시간도 제법 늘었다. 리프팅은 열 개가 최대다. 풀타임을 뛰어도 두 시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만큼 체력이 늘었다.
어영부영 열심히, 매주 꾸준히 공을 찼다. 그러다 휘뚜루마뚜루 대회까지 출전하게 됐다.
시작한 지 약 일 년 정도 됐을 무렵이다. 모든 카테고리를 통틀어 인생 첫 대회였다. 평소 자기 객관화가 빠른 편인 나는 '주제 파악'을 명분으로 단호하게 불참 의사를 내비쳤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나 천재' 팀원들은 초보들도 많이 올 거라는 우쭈쭈의 말 대신 '거기 가면 돗자리 깔고 누워서 도시락 먹고 과일 먹고 완전 대존잼 축제임 걍 우리끼리 소풍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며 파워 외향인의 니즈를 꿰뚫어 버렸다.
사실 인원이 부족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끌어모아 나가야 할 판이었던 것도 맞다.
혹해버린 일자무식이는 오케이 했고, 긴장은커녕 대회 가는 차 안에서부터 '참치김밥 먼저 먹어도 되냐'며 돼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대회 전날에 참치김밥 먹는 게 설레서 잠을 못 잔다. 심지어는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으니 팀원들 김밥도 좀 싸 달라' 요구할 정도로 진심인 불속성 효녀)
축제라는 말을 빼고는 대체로 거짓이었다. 소풍은 개뿔. '차라리 죽여'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더웠고, 비가 넘쳐 돗자리 펼 곳도 없었다. 외부적 요인까지 괴롭히니 훨씬 고통스러웠다.
그 아사리판 속에서 안 뛰면 몸 늘어진다고 잘 쉬고 있는 사람 불러다 달리기 시키는 언니들이 괘씸(?)했다.
실제 경기는 더했다. 작정하고 이겨보겠다 맞붙으니 몸이 세 배는 더 힘들었고, 긴장감 때문에 숨 쉬는 방법부터 자리 찾는 방법까지 모조리 까먹었다. 친선 경기 정도로 생각했으나 천지차이였다.
크고 작은 부상자들도 많았다. 풋살 대회가 아니라 생존 대회 같았다. 여차하면 나도 큰일 나겠구나 생각하니 더 움츠러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데뷔골을 넣었다.
최대한 2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재미있으니까 3편까지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