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바에 가면 의외로 혼자 술을 마실 수 없다

내편 질량 보존의 법칙

by DONA



태어나 처음 집 아닌 공간에서 혼술을 했다. 첫 도전이라는 점에서 들뜬 건 사실이지만 생각 정리를 위함이 전제된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놓으면 시야각이 확장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니, 도망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환기에 대한 책임감을 나눠 짊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장소를 물색했다. 새로 오픈했다는 가게는 이미 리뷰가 꽤 쌓여 있었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나를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었다.


“다양한 인사이트를 찾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붉은 조명의 반지하 입구로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책이 빼곡한 책장이 있고, 중앙에는 족히 스무 명 정도 앉을만한 디귿(ㄷ) 자 형태의 바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방명록, 데스노트, 고민 노트 같은 손때 묻은 노트 몇 권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불러낸 주범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좋아하는(가장 만만한) 테킬라 선라이즈 한 잔을 주문한 후 방명록을 집어 펼쳤다. 손기름 먹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위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얹어가면서. 재미없으면 들고 온 시집을 읽거나, 책장 속 아무 책을 뽑아다 읽자 마음먹었지만 어느 페이지에서는 마음이 먹먹했고, 어느 페이지는 꼭 내 맘 닮아서 세 번 읽기도 했다. 사는 이야기가 주는 흡입력은 강하다.




처음 오셨나요? 칵테일과 함께 질문이 되돌아왔다. 어리게 생긴 나보다도 훨씬, 몇 곱절 더 어려 보이는 바텐더의 여유로움에 조금 기죽었던 것 같다. 쫄리는 시기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대충 한두 잔 마시고 가야겠다.


기대만큼 사색이 수월하지도 않았다. 여력 없던 당시에는 최소한의 사회성을 펼치는 것도 벅찼기에 어떻게 왔는지, 무얼 하다 왔는지 같은 스몰 토크에 염증 도져 버렸다.

기껏 에에, 네에 따위의 진심도 진실성도 없는 답을 뱉어내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워 부채감이 들었고, 목표했던 한두 잔에서 과감히 ‘두’를 지웠다. 인사이트고 나발이고. 이거 마시고 가자.


무언가에 짓눌린 사람에게 허리 펴라 말하는 건 압력을 이겨내라는 뜻 같다. 화장실로 도망친 나는 불쾌한 중력의 근원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손 씻으며 거울을 봤다. 웃음기가 없다. 하얀 니트에 피어난 보풀이 도드라져 보인다. 어중간한 기장까지 승질 돋우는 건 ‘이럴 때가 맞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속 긁는 스스로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오니 그 찰나에 새로운 여성 두 분이 내 자리와 바투 앉아 있었다. 모서리진 코너에 쪼르르 꺾어 앉게 된 상황. 내 공간을 침범할까 봐서 밀착해 앉은 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저 이제 갈 거예요. 넓게 앉으세요.


“자리가 좁죠? 이쪽으로 더 오셔도 돼요!”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인지 모른다. 집에 안 가고 싶었나 보다. 첫 도전의 낭비, 이럴 때가 뭔데? 답을 가져다 붙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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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그렇게 도합 다섯 잔의 칵테일을 마시고, 마감 때 퇴장하게 된다……. 맞다, 나는 중간이 없다.








두 사람은 나와 두세 살 터울 언니, 동생이었다. 또래는 곧잘 통하는 수준을 넘어 원래 친구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길 나누며 외딴섬을 구축했고, 다짐했던 막차까지 떠나보내게 만들었다. 계기라면 ‘마음먹었음’이 가장 크지만, 웬 취객 하나가 내 옆자리에 앉아 주면서 시작된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다 풀린 눈깔로 엉겨 붙는 주취자는 대화가 안 통했다. 계속 나이를 묻기에 답해 줬다. 적지 않음을 내세워 돌려보낼 전략이 맞긴 했어도, 막상 ‘나이 지인짜 많다’ 들어 버리니 헛웃음이 났다. 뭐가 안 되려면 기분 풀고자 노력해도 팍 잡쳐지나 보다. 그닥 푸르뎅뎅해 보이지 않는 몰골로 외간 여자한테 개수작 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닌데요. 무어라 답할 가치 없긴 했으나 먼저 내지른 건 옆에 앉은 언니였다. 굉장히 무례한 거 아세요? 하고. 이후 상황은 사장님이 그를 돌려보냄으로써 마무리됐고 전적 포함 진상짓 2회 누적으로 출입이 금지될 거라고 했다.

언니는 내게 ‘너무 놀랐겠다’로 운을 띄운 후 신랄한 육두문자의 나열을 선보였다. 나도 힝, 하다가 그녀를 따라 했다. 물론 동생도 그랬다. 그렇게 이방인들은 큰 안주거리 하나 얻은 채 긴 시간 표류하다가,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후에야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난 자리에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남았다. 서로의 SNS나 연락처도 묻지 않았다. 난데없이, 어디서든 꼭 내 편 한 명쯤은 튀어나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얻었다. 그걸로 족하다.




그들을 보낸 후 혼자 남아 방명록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펜도 쥐었다. 하루동안 열댓 번 뒤집힌 감정을 기록해야겠다. 꾹꾹 눌러 적히는 취중 진담을 사장님이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뭐라는지 모르겠죠?’ 혼잣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일찍 가실 줄 알았는데 저랑 같이 퇴근하시네요! 생글생글한 바텐더가 이번에는 부채감을 녹인다. 아까는 그랬는데요, 안 가길 잘한 것 같아요. 졸업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대충 자존심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내용… 처음엔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쫄아있었으니까…ㅋ


가기 전까지 계속 고민했다. 즉흥적 수행에 도 트이지 않아서(또는 변덕이 죽 끓듯 해서) 가려다 말고, 말려다 갔다. 내게 외투 입혀주고 신발 신겨준 것 또한 야유해 친구들이었다. 어차피 읽을 책이면 나가서 읽어 보자고, 기분 전환 될 거라고. 그래서 기어나갔다. 더 이전에는 호흡 고를 타이밍을 느껴 보라고 말했다. 은지가 그랬다. 속이 졸렬해서 그 말의 알맹이를 꺼내어 보지도 않고, 시간의 눈 한가운데 갇혀 하루처럼 흐르는 한 시간을 버텨내느라 돌이켜보면 짧은 시간일 거라는 진심 어린 말도 담아 듣지 못했다.



넘어지면 무릎 다 깨지는데 무슨 정신으로 쉴 수 있을까. 결승선을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소떼 같은 무리 속에서 밟히지 않기 위해 몸을 한껏 움츠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사실 나는 뛴 적이 없다. 그저 앞만 보고 걷는 건 억울해할 명분으로 적합치 않은 듯하다. 터벅터벅 걸음에도 숨이 찰 수 있지만 그만한 근성은 모두에게 있으니까. 내달릴 노력을 해야지.


라고 채찍질 할 필요가 없었다. ‘완벽주의자’ 같은 쓸데없는 단어가 때로는 포기를 종용시키지만, 노력이라는 건 어쩌면 전력질주뿐만이 아닐 것이다. 엎어진 사람은 흙 털고, 피 닦고 숨 고르는 데에서 터닝 포인트가 시작된다. 아니, 사실 몰라. 컨트롤 + S 잘 눌러놨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엉금엉금 그늘 찾아 기어간다. 요즘 어때, 밥 뭐 먹었어? 잠은 오래 잤어? 재미있는 이벤트 없었어? 돌아가며 호흡을 체크해 준다. 그게 꼭 무리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뜻 같아서 응어리가 싹 녹는다. 다시 한번 깊게 내쉬고, 마신다.



이토록 당연한 것도 알려줘야만 알 때가 있다. 사색은 실패했으나 모쪼록 생각 정리는 달성했으니 첫 도전은 모든 측면에서 성공이다. 내편 질량 보존. 도망친 곳에서 입꼬리가 아플 때까지 웃는 내가 정해 준 주제는 넘어져도 넘어가진다는 것.



사람 없인 못 사는 팔자가 올해 목표를 상기시킨다. 기념일 아닐 때 불시에 좋은 선물 해 주기. 뭘 사 주면 좋을까 고민하면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편먹고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