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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정 Nov 27. 2023

성, 사랑, 장애가 한 문장에 놓이도록,

   아침 출근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큰 글씨로 쓰여진 역명을 보았다. 외국인을 배려해 꽤 크게 쓰여진 글씨가 오늘따라 아니꼽다. 장애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쯤까지 나는 약 3개월 간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출근을 원활히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들 덕분에 내가 편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도,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경험치 못한 세계에 대해서 말을 함부로 얹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실례가 될 수 있을지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와 유사한 감정이 그들을 어떤 존재로 만드는지 알았던 까닭이다.

   

   다시 아침 출근길로 돌아와서, 그토록 크게 쓰여진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자국민에게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한사코 거부되는 것이 억척스럽게 느껴졌다. 뉴스에서 봤던 장애인 이동 발판을 가지고 장애인의 탑승을 막는 모습이라던지, 오늘 아침에 봤던 휠체어를 막아서고 승강기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던지 하는 풍경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장애인 배려'는 그들이 조용히 있을 때나 제공되는 특례품이었다. 장애인이 장애인에 대한 말을 할 때 그들의 의견은 가장 강하게 묵살 당해버리고 만다.


   현재 하는 업무는 그 특성상 장애인과 교류가 잦다. 이전에는 그들을 마냥 돌봐야할 대상으로 봤지만, 일을 하다보니 그들 중 일부는 가끔 귀찮고 화나게 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나는 이 변화가 좋다. 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동등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그들이 장애로 인한 한계를 느낀다는 것을 안다. 그 점은 당연히 고려함에도 여전히 무례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친절한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기준에 장애는 포함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 무조건 친절을 베푸는 행위는 연민에 가깝다. 누구든 '불쌍하여 연민을 베풀어야 할 이'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건네려던 연민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장애와 성에 대해 생각한다.

   몇 개월 전 쯤 유행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지만 여기서 장애와 성을 에피소드로 다루었던 것을 안다. 영상매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과 성의 연관성에 대해 고려해본다는 것이 좋다. 비록 유쾌한 에피소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영영 배제되어야 할 주제도 아니었다. 인간의 탄생은 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을 숨겨야할 것으로 여긴다. 비장애인 사이에서도 그토록 조심스러운 성이 장애인을 두고 논의되기 쉽지 않음을 인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주제를 다루고 싶다. 장애인 또한 인(人)이 아닌가! 성욕의 생성과 분출은 그들에게도 마땅히 주어져야할 권리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를 조용히 혼내셨다. 그 분께 들리지 않되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우리 부모님께서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멋진 분들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장애인과 결혼한 비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께서는 비장애인 반려자를 보고 '대단한 사람', '멋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장애인을 평생 돌보며 살아갈 엄청난 결심을 한 사람이라고. 나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직접 경험해보니, 사랑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유 없이, 좋아지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알고나니 의문점이 생겼다. 그 때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비장애인 배우자를 과연 엄청난 결심을 한 사람이라고 여겨도 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저 사랑해서, 함께하고 싶어서, 결혼했을 뿐인데 그 상대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에게 원치도 않는 상장을 부여하며 그의 사랑을 희생정신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성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아야한다는 글을 읽고도 여전히 '성관계' 혹은 '섹스'를 '사랑'이라고 칭한다. 이는 필시 내가 자라온 환경 탓이리라. 종종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곤 하는 성교육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또 내 주변만 해도 그렇다. 성인이 되기 전 콘돔을 실물로 본 적이 있는지 물으면 그러지 못했다는 대답을 자주 들을 수 있다. 하물며 본 경험도 없는 것을 사용하려니 불편하고 어색하여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길 바란다.) 사용하는 방법이 콘돔 박스 안에 적혀있다는 사실조차 유튜브를 통해 배운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이 콘돔을 사려고 할 때 불편한 시선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피임을 잘 하고 있는가'지 '그들이 성관계를 하는가'가 아니다. 콘돔을 사는 학생을 불편하게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장애인의 성생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계속해서 미뤄질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게 딱 맞는 말이다. 많은 성인들은 미성년자가 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생각하는 적절하고 올바른 선까지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올바른 선을 뛰어넘는 행위, 그러니까 성행위를 하는 청소년을 보면 그 청소년을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아이로 낙인시켜버리고 만다. 비장애인 학생들에게도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설명이 미비한 현실에서, 더 어린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는 장애인(특히 지적 장애인)의 성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난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장애인으로 하여금 성욕을 평생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욕구로 만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대학을 다닐 당시에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 

   한 판사가 가해자가 지적 장애인인 사건을 맡았다. 가해자의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평소 행실이 정상적임에도 성폭행을 저질렀다. 판사는 그 사람이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계기가 궁금해 물었고, 가해자는 과거 시설에서 지내면서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해 그것이 성욕의 정상적인 발산이라고 학습하여 위 같은 범죄를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 한 학년 아래의 장애인 후배가 있었다. 나는 계단에서 그 후배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후배가 갑자기 내 생식기에 손을 얹었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후배의 얼굴을 보니 해맑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배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책의 사례와 나의 경험을 비추어보았을 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성교육에서 배제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있다. 오히려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며, 어떤 형태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또 어떻게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지 더욱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책의 사례를 한 개만 더 빌려보겠다.

   한 특수교사가 남자 인형의 음경을 가리키며 학생들에게 "누군가 이것을 입이나 성기에 넣으려고 하면 거절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특수교사가 그 인형에 빨간색 도트 스티커를 붙여가며 낯선 이가 신체 중 어떤 부위를 만지지 못하게 해야하는지 설명한다. 그러자 학생이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 그러면 내 몸 중에 어디를 만지게 할 수 있나요?

    장애인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그저 나의 몸을 만질 수 없게 하는 것에서 그쳐야 하는가? 그들의 몸이 성숙했더라도 성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부여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닌 '성 거부권'이 아닌가.


   "장애인이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때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사랑을 기반으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물을 때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사랑을 한다. 비장애인이 그런 것처럼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더라도 장애인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이상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성생활에 대해 폭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야한다.  이를 위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장애인의 성을 다루는 교육이 필요하다. 다만 성관계나 자위행위 등을 설명하기 전에 정서적 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필시 장애인의 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제로 말 할 때 꺼내지 않았던, 어쩌면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주목할 때가 됐다.

   이는 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장애인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이 현재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들의 자유와 즐거움에 대한 연구가 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이 겪고있는, 혹은 겪게 될 성생활이 원활하게 논의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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