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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Dec 28. 2022

밥을 풀 때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는 괜찮단다. 다 괜찮단다.


김이 몽개몽개 올라오는 갓 지은 새 밥을 푼다.

식구 수대로 밥공기에 밥을 다 푸고 한 공기 남짓 남은 밥을 통에 담는다. 그리고 당신 밥은 어제 먹다 남은 식은 밥을 꺼내 데워서 밥공기에 담았다.


새 밥 있잖아.


엄마의 밥그릇을 공유할라치면 한사코 말린다. 기어이 내게 새 밥을 먹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혹시 밥이 모자라 더 달라고 할 수 있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한 덩어리 남은 새 밥을 먹지 않았을 터.

당신을 뒤로 젖히고 매사 가족들에게 희생과 양보를 하는 모습에 답답함과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졌다.




시댁에서 보내는 첫 명절이었다.

여성의 노동력과 희생이 당연한 그런 집 안이다. 친정 부엌에 서 있을 땐 못 느낀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성씨 다른 두 동서는 앞치마를 둘러메고 일하러 온 사람이고, 그 외 성씨 같은 사람들은 말할 필요 없이 한 식구였다.

그들이 속한 장소 역시 엄연히 달랐다. 주방과 거실은 눈에 보이지 않은 경계선으로 두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었다. 유쾌한 명절은 아니었다. 종아리가 아프고 발바닥이 부을수록 불쾌감이 더해진다. 윗동서가 옆에 와서 내 귀에 대고 살짝이 말했다.


우린 그래도 행사가 없는 수월한 집안이야.

일 년에 몇 번만 고생하면 돼.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서 노동을 짊어지셨나.

동조할 수 없었지만 그냥 침묵했다.




참기 힘든 순간에 당면했다.

초보 새댁은  주걱을 쥐고 밥 푸는 역할이 주어졌다. 밥보다 더 뜨거운 국은 주방경력이 많은 윗동서가 담당했다. 아직은 좀 낯 설고 개개인의 밥 량과 식성을 잘 모르는 식구들의 밥을 푼다. 양 조절을 잘 못해서 두 며느리의 밥이 간당간당하다. 조금 남은 밥을 윗동서 그릇에 푼다.

마지막으로 반주걱 채 안 되는 주걱에 붙은 밥을 밥그릇에 쓱 긁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식은 밥 한 덩이를 덜어 밥그릇에 조금 더 담았다. 내 몫이었다.


거실안쪽에서 시작된 상 윗자리에는 아버님 어머님 남자 어른들, 부엌 가까이에 윗동서와 여자조카들이 앉아서 웃으며 달그락달그락 수저질이 바쁘다. 밥상 끄트머리에 저린 종아리를 접고 앉았다.  밥그릇에 담긴 식은 밥 한 덩이 보는 순간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차올라서 젓가락질이 안 된다. 기름냄새에 절어 입맛도 없거니와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았다.  


밥상을 차리느라 종일 일한 사람은 바로 나인데, 주걱을 가진 사람도 나인데, 식은 밥 먹으라고 한 이 없건만 자초해서 식은 밥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다. 상황을 알 리 없는 신랑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잘 차려진 밥상에서 반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눈꼴이 시렸다. 타인이구나. 한 공간 한 밥상 앞에서 행복함의 극치와 서러운 자의 목멘 감정의 빈부격차가 느껴졌다.




초보새댁은 거품이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닦으며 다음 끼니때를 기다렸다.

량 조절이라는 큰일을 해야 했다. 쌀양 물양 한 공기 밥양 식은 밥 양. 아까보다 쌀을 넉넉히 스텐볼에 담았다.


이런, 명절이라 기름진 주전부리 탓인지 식사를 마치고 물린 상에는 덜어놓은 밥이 제법 남았다.


다음 끼니때를 또 기다렸다.

밥주걱을 쥐어 든 자는 요령을 부려보았다. 주변을 슬쩍 살피고 식은 밥을 후다닥 새 밥 위에 부어서 살살 섞는다. 매끼 모두가 갓 지은 찰진 밥을 먹을 수 있게, 최소한의 식은 밥이 남도록 쌀양을 조절해봤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끼니때마다 개개인의 허기짐이 다르니 당연한 것이었다.  초보새댁은 튀김 할 양에 따라 기름양을 정하듯 나물 무칠 양에 따라 양념 소금 양을 정하듯 정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밥을 푸는 자는 명쾌하게 이 상황을 종료했다.

밥솥 뚜껑을 열자마자 국 대접에 밥을 소복히 퍼 솥 뒤에다 살짝 두었다. 내 몫이다.

혹시 밥이 모자라면 식은 밥을 레인지에 돌린다. 그 위에 새 밥을 얇게 덮어서 남편 자리에 슬며시 놓아둔다.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짜릿하다.



매일 아침 압력솥에서 칙칙 달그락달그락 추 소리가 들린다. 약불로 낮추고 4분 타이머 설정을 한다. 김이 다 빠지고 작은 추가 딸각 소리를 내며  아래로 툭 내려간다. 손이 델까 조심스레 뚜껑을 비튼다. 뜨거운 김이 날아가고 구수한 밥 냄새를 맡으며 촉촉하고 찰진 밥을 주걱으로 휘익 저어서 밥 한 공기를 정성 들여 푼다.  

흐뭇한 내 밥이다.



따뜻한 밥 한 공기에 엄마 얼굴이 떠오르는

유독 눈 소식이 잦은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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