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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24. 2023

어떤 약속

 오늘은 기필코 아이들과 마트에 가기로 한 날이다. 남편이 없는 주말에는 큰 결심을 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관밖으로 나오고 보니 생각보다 서늘했다. 아이들의 옷을 다시 여미고 계단으로 내려왔다. 나의 왼쪽에는 첫째 아이가, 오른쪽에는 둘째 아이가 손을 잡는다. 내가 아이들의 손을 잡아준 것인지, 아이들이 내 손을 잡아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외출을 할 때면 늘 그래왔다. 나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했고 아이들은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무의식 중에 생긴 이라고나 할까.


 의식에서 비롯된 약속들은 길을 걷다가도 흔하게 마주친다. 집밖으로 나와 몇 발작만 걸으면 작은 고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인도 위에 주차하지 말라는 무언의 약속이지만 가끔 나를 공격하는 화살이 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바로 코앞에서 고깔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어림짐작으로 피해서 걸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매번 자리를 조금씩 이동하는 고깔 때문에 그걸 발로 걷어차고는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오늘만큼은 고깔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든든한 방패 같은 아이들이 함께하는 날 말이다.


 아파트입구로 걸어 나오면 작은 건널목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건너던 곳인데 이제는 신호등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으려니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관지가 약했던 둘째 아이는 감기에 자주 걸렸다.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이 건널목을 건너 병원에 다녀오곤 했다. 지금은 건널 수 없는 강물 같다. 오작교의 까마귀를 대신할 아이들과 남편이 없이는 혼자건너가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적어도 점자블록이나 음성안내 버튼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까마귀일 테지. 비둘기도 좋고 참새도 좋다. 나에게도 자유롭게 하늘 위로 날 수 있는 날개라도 있다면 어디든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귀찮고 하찮게만 여겨지던 비둘기가 못내 부러운 마음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 건물 2층에서 바깥으로 길게 뻗은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 아래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몇 대째 이어왔는지 모를 비둘기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등하굣길에 고개만 살짝 들면 비둘기가 보였고 벽이나 계단과 바닥에는 온통 비둘기들이 흘린 배설물들이 그득했다. 게다가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 사이로 마실을 나온 비둘기들의 모습이 종종 보이곤 했다.


 구 거리는 소리를 내며 뒷짐을 지고 한가로이 거닐던 비둘기의 모습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어디에 있든 간에 내 눈앞에만 띄지 않길 바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와 몸이 닿기라도 하면 나 비명을 지를 태세였다. 비둘기의 날개 속에는 수만 가지의 세균이 득실댄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한껏 긴장한 상태로 비둘기 둥지를 응시하며 지나던 고등학교시절이 뇌리를 스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언제나 비둘기가 있었다. 한산한 공원은 물론이고 사람이 붐비는 도심 속 여기저기, 어린이집 앞 놀이터와 아파트 구석구석... 수없이 많은 날을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비둘기와 몸이 맞닿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사람이 만들어낸 의식 속의 피해자가 아닐까. 사람이 그들을 더럽다며 피해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사람을 피해 다녔을지도 모른다.


 제 나는 조용히 걷는 비둘기가 내 발 바로 앞에 있어도 잘 알지 못한다. 자칫 잘못해서 비둘기가 발에 밟히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러나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둘기는 단 한 번도 사람의 보행을 방해한 적이 없다. 나와 가까워질라치면 걷거나 날아서 길을 내어주곤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말 그대로 무의식 중의 약속이 아니었을까.


 "엄마. 초록불이야. 얼른 가자."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에 초록불이 켜졌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널목을 걸었다. 희미하게 바삐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트로 가는 지름길은 주택이 즐비한 골목길인데 사람이 걸어갈 인도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차가 오면 사람들은 골목 가장자리로 자리를 내어주고 빠르게 달리던 자동차는 서행했다. 오늘따라 골목길에 비친 가을햇살이 유난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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