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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by 레잇 블루머


마트는 매일 아침, 열 시에 시계를 맞춘다.

주연은 날마다 바뀌지만, 대본은 언제나 비슷하다.


“오늘의 한정 세일 품목, 1인 1개 반값!”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른 물건까지 사게 하려는 계산.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동네 형편이 어려운 이들,

특히 노인분들이 그 시간에 맞춰 몰려든다.

그들은 딱 그 할인 품목 하나만 사서 곧장 빠져나간다.

마케팅 따위는 통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


그날 세일 품목은 1000ml 우유 한 팩이었다.

아홉 시 반부터 줄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은 노인분들이었다.

각자 손에 우유 한 팩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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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전 열 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마트 안을 가득 메운 수많은 기다림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이 뻐근해졌다.


안내 방송은 “열 시 정각, 1인 1개”를 반복하고 있었고,

서둘러 합류하는 사람들로 인해 줄 역시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줄 중간쯤, 두 명의 꼬마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매 사이로 보이는 여동생과 오빠.

둘 다 우유 한 팩을 들고 서 있었다.

바로 뒤에는 아이들의 할머니가 계셨다.


순간, 가슴이 한여름 햇살보다 뜨겁게 저며왔다.


여름방학이었다.


그때는 한참 휴가 시즌이었기 때문에

배달을 위해 아파트 주차장을 찾으면

여행 준비에 바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수영장을 가고, 여행을 떠나는 시간.

이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반값 우유를 사기 위해 줄에 서 있다.


나는 아이들 이야기에 유독 약하다.

망하기 전까지는 결식아동, 아동학대, 결손가정 등의 아이들을 위해 소액이라도 꾸준히 후원을 해왔다.

내 안의 어떤 결핍 때문일 것이다.


문득, 예전에 거북이의 '비행기'라는 노래를 듣다가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행기를 타고 가던 너, 따라가고 싶어 울었던...”


그 한 줄의 가사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네 식구가 롯데월드에 간 적이 있지만

군중 속에서 둘씩 흩어지고 말았다.

휴대전화도, 삐삐도 없던 시절.

네 식구가 함께 웃었다는 장면이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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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마음이 울컥했던 건,

아마도 내가 아이들의 자리에 서 있었던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우유 팩을 꼭 쥔 손이 내 유년의 빈자리를 건드렸다.


그 작은 우유가

누군가의 생활을 지탱하는 기둥,

누군가의 여름방학을 설명하는 배경,

그리고 누군가의 성장기를 기억하게 만드는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준비된 우유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빠르게 사라졌고

사람들은 계산대를 지나 각자의 오전으로 흩어졌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누군가는 여행 가방을 싣고,

누군가는 우유 한 팩을 들고,

누군가는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이렇게나마 짧게 남긴다.


누군가의 삶이 여기 있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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