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기상청 공식 발표 온도는 38도였다.
아스팔트 위로 신발 밑창이 달라붙는 듯했고,
공기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이마를 거쳐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상자를 붙잡은 손에 자꾸 힘이 빠졌다.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피부 곳곳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우고,
남아 있던 물병을 털어 비웠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물은
시원하기보다 뜨겁게 데워진 듯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계단 앞에 섰다.
그때였다.
내 안에서, 혹은 계단 너머에서,
알 수 없는 대화가 시작된 것은.
느림보:
헉헉, 또 왔어.
그런데 오늘은 너무 많잖아.
계단:
너는 무게를 원망하는구나.
느림보:
무게가 아니면 뭐겠어.
쌀, 소주, 과일, 기름통...
전부 내 두 손에 달라붙어 있어.
이건 짐이지, 누가 봐도.
계단:
무게는 짐이 아니다.
무게는 흔적이다.
네 몸에, 네 뼈에, 네 하루에 새겨지는 기록이다.
느림보:
기록? 이건 그냥 고통이야.
내 무릎이 부서지려고 해.
계단:
고통은 너를 갉아먹지 않는다.
고통은 너를 증명한다.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벽에 기댔다.
허벅지가 비명을 질렀고
숨은 더욱 가빠지고 있었다.
계단은 아직 태연하게 위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내 고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더 오르라 채찍질하는 듯했다.
느림보:
하지만 왜 꼭 아파야 하는 거야?
왜 고통이 있어야만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건데!
계단:
고통은 벌이 아니다.
신호다.
너의 몸이 아직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느림보:
신호...?
계단:
감각이 사라진 몸은 죽은 몸이다.
아픔은 네 신경이 깨어 있다는 증거다.
무게를 짊어지는 순간, 뼈와 근육이 울부짖는 그 소리...
그것이 곧 생존의 노래다.
느림보:
웃기지 마!
그런데 그 노래는 너무 시끄럽잖아?
나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고.
계단:
고통은 불청객이 아니라 동반자다.
네가 원하는 조용한 삶조차, 고통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동반자라니.
내 무릎을 부수고, 어깨를 짓누르는 이런 동반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작 이런 존재를 곁에 두라고?
차라리 혼자가 낫지.
투덜거리며 한 발 더 올랐지만, 어쩐지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느림보:
근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데?
왜 나만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해?
계단:
너만의 무게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누구나 각자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단지,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느림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잖아.
그게 더 나은 삶 아니야?
계단:
물론 엘리베이터도 길이다.
편하고 빠르지.
그러나 멈춰 섰을 때, 그들은 계단을 바라보며 망설인다.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자신의 다리로 계단을 오른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이고 능력인지.
엘리베이터는 빠르다.
하지만 계단은 훈련이다.
한쪽은 속도를 내지만, 다른 쪽은 근력을 남긴다.
어느 쪽도 옳고 그름은 없다.
단지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길 뿐이다.
느림보:
...그럼 나는 왜 자꾸만 이렇게 무거운 계단을 오르고 있는 걸까.
계단:
그것은 네 선택이다.
남들이 외면한 길을 네 발이 붙잡았다.
그리고 삶은 그 선택의 무게를 보여주며 다시 묻는 것이다.
네가 선택한 길이 너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 네 자신이 직접 증명하라고.
나는 다시 짐을 움켜쥐고 발을 내디뎠다.
계단의 끝은 아직이었다.
호흡은 가빴지만, 어쩐지 그 속에서 점점 리듬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왼발, 오른발, 호흡, 땀.
모두가 하나의 박자가 되어 이어졌다.
느림보: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야.
계단:
힘들지 않은 삶은 비어 있다.
네가 짊어진 것은 짐이 아니라 시간이다.
느림보:
짐이 아니고 시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계단:
무게는 언젠가 내려놓지만, 시간은 쌓인다.
오늘의 계단, 내일의 계단, 어제의 계단이 겹겹이 쌓여 네 하루를 두껍게 만든다.
고통은 흔적을 남긴다.
지금 네 발바닥에 새겨진 굳은살처럼.
처음엔 쓰라리지만, 반복될수록 단단해진다.
그 굳은살이 바로 네가 걸어온 시간의 증거다.
그리고 그 두께가 곧 너라는 사람의 모양을 빚어낸다.
두께라...
그렇다면 내 삶이 발바닥의 굳은살처럼,
마치 페이지가 쌓여 두꺼워지는 책처럼...
지금 이 땀과, 눈물과, 고통이,
고스란히 내 몸에, 내 삶에 새겨진다는 건가?
느림보:
...그럼 얇은 시간과 두꺼운 시간은, 대체 무엇이 다른데!
침묵.
아무 대답이 없다.
헉헉대는 숨소리만 계단에 울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지막 층에 도착해 있었다.
땀으로 젖은 양손 위,
상자가 호흡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다시 내려가야 할 계단뿐.
후...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가빴던 숨이 조금은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의 땀방울은 여전했고,
눈가를 거친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 것은.
땀은,
눈물이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그 흔적은,
계단을 딛고 올라서는 내 발걸음마다,
나의 이야기로 기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