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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May 30. 2023

평생 주고 싶은 도둑

엄마와 딸


엄마가 한국에서 캐나다로 오실 날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스케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회사서 참여해야 할 프로젝트가 연달아 추가되고, 영어 튜터링 학생이 늘어나고, 글을 써야 할 플랫폼도 더 생겨났다. 물론 다 내가 벌려둔 일이지만 그래도 그동안은 딱 적당히 바쁘고 여유로운 일상을 수개월간 보내왔는데,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정이 겹쳐서 생기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몇 년 만에 드디어 엄마를 집에 모시고 토론토에서 단 둘이 보내는 귀한 시간이라 좀 여유롭게 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거늘, 역시 뭐든 맘처럼 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엄마가 온 덕분에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밥 한 끼 굶지 않고, 든든한 도시락도 매일 가지고 다닌다. 그뿐인가. 귀가하는 저녁마다 가지런히 정돈된 살림과 반듯한 침대가 나를 반기고, '으아, 피곤해.' 찡얼거리며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벌러덩 누우면 '배고프겠다, 얼른 저녁 먹자' 하는 엄마의 소리에 식탁엔 집밥이 차려진다. 한국 식재료를 온전히 구할 수 없어 어설프게나마 만들어낸 자그마한 한식 밥상. 혼자서는 절대로 지어먹지 않을 콩밥을 한 숟갈 가득 입에 떠 넣고 된장찌개도 한술 크게 떠 삼킨다. 미주알고주알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맞장구를 친다. 가만, 혼자선 어떻게 저녁을 보냈더라. 요리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날들을 샌드위치나 라면으로 때웠다. 일주일에 한 번 집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했던 날들은 며칠 새 벌써 희미해졌다.


아침마다 정신없이 집을 나서기 바쁜 딸을 대신해 엄마는 반찬을 만들고 청소를 한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낯선 외국 땅에서 무료하고 외로우실까 죄송하고 맘이 쓰이지만 엄마는 얼마 만에 해주는 내 뒷바라지냐며 오히려 기쁘단다. 너를 찾아주는 곳이 많아서 감사하고 또 엄마가 와 있을 때 바빠져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누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고. 궁상맞게 사는 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시면 어쩌나, 호사로운 대접을 받지 못해서 서운하실까 했던 내 걱정만큼 바보 같은 게 없었나 보다.  


엄마가 오시기 전 튜터링 수업 중 아주머니 학생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너무 잘해 놓고 (엄마를) 기다리지 말아요. 너무 깨끗하게 잘해놓고 살고 있으면 엄마는 은근 서운하다니까.'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에피소드를 <응답하라 1988>에서 본 것 같다. 정봉이네 엄마는 본인의 부재에도 깨끗한 집과 멀끔한 세 부자의 상태(?)에 서운함을 느낀다 (사실 그게 아니었지만). 수년간 서포트해 오던 사람들, 특히 가족에게 더 이상 내 역할이 필요해 보이지 않을 때, 후련하지만 아쉬움이 더 큰 모양이다. 드디어 자식 뒷바라지에서 해방되어 당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훌쩍 너무 멀리 가버린 딸을 떠올릴 때마다 조금 더 잘 뒷바라지해 줄 걸 싶으셨던 엄마와 조금 더 엄마 품을 느낄 걸 싶었던 딸에게 주어진 기회. 자식은 자꾸 주고 싶은 도둑이라 했던가. 도둑이 캐나다까지 갔는데도 쫓아와서 퍼주는 울 엄마한테 나는 졌다. 조금 더 철없이 엄마에게 칭얼거리고 먹고 싶은 반찬을 만들어 달라고 떼써야지. 그리고 귀찮다 하셔도 손을 잡아끌고 이리저리 함께 다녀볼 요량이다. 가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은 유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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