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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몽 박작까 Jun 03. 2023

사다리 또 타는 사모님

환풍기 닦을 줄 아시나요?


따르릉릉릉.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빨래방에서 일하시는 이모님이다. 이 이모님으로 말하자면 손이 무지 빠르고 야무진 청소의 신이다. 청소뿐 아니라, 뚝딱뚝딱 일 잘하고 힘도 센 맥가이버랄까. 여탕 청소담당이셨다가 지금은 빨래방에서 일하신다. 일한 지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직원들 사이에서 터줏대감이어서 모르는 게 없는 소식통 역할을 하신다.


이모님은 나에게 할 말이 있어 전화하셨단다.


"내가 참다 참다 이건 아니다 싶어 얘기해요. 지금 계신 (청소) 이모님들이 문제가 많아. 서로 남탓하고 서로 일 미루고. 아침에 공용실 청소하는데 시간이 늦으니까 청소기도 안 밀고 대충 청소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이스방 청소하는 거 알려주려고 하는데 배우려고도 안 하고. 아니 세상에. 나 참 황당해서."


사건의 요지는 이랬다.

1. 새로 오신 여탕청소 이모님 두 분이 지인 사이인데도 서로 청소 안 한다고 욕하고 화낸다.

2. 오늘 공용실을 청소하는데 남탕 청소 아저씨가 늦게 나와 여탕 청소 이모님도 대충 청소했다.

3. 청소를 알려주려고 해도 내가 해야 할 일 아니라고 알려주지 말라고 한다.

4. 손님이 얘기한 것 대신 전하면 화낸다.


결국 이 얘기를 모두 하시고 나보고 여탕청소 이모님께 얘기를 하라고 하신다.






사모님의 역할은 다양하다. 오늘은 잔소리를 해야 하는 역할이다. 이럴 때는 참 난감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 권리를 주장한답시고 '진상'을 부리는 손님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부러울 때도 있다.


간호사 시절이 떠올랐다. 군기를 잡는 답시고 윗년차 간호사가 아랫년차 간호사에게 총대 매고 혼내는 역할을 한다. 신규간호사 시절에는 혼나서 힘들었는데, 위로 갈수록 잔소리하는 역할을 하는 게 힘듦을 느꼈다. 더군다나 지금은 잔소리를 해야 하는 분들이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엄마 뻘인 분들이니 더더욱이나 어렵다.


요즘 청소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얘기도 전달받으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를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딱 봐도 나이가 한참 어린 나이에 이것저것 잔소리 할 때 누가 좋아하랴. 잔소리는 누구에게나 들어도 기분 나쁜데,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잘못 얘기하면 어린것이 짜증 나게 군다고 얘기 듣기 딱 좋을 상황. 게다가 빨래방 이모님이 얘기했다고 하면 두 분이 싸우실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그리고 빨래방이모님 오해 사지 않게 얘기를 잘 전달할까 짱구를 굴려봤다. 사장님 핑계를 대기로 했다.


청소 이모님에게 잠깐 할 말이 있다며 따로 불렀다.


"이모님 오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좀 어떠세요? 힘드시죠? 사실 두 분 오시고 나서 청소가 잘 안 된다는 얘기가 들려왔었어요. 그런데 오신 지 얼마 안 되셔서, 적응하시느라 그렇겠지 하고 얘기 안 드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사장님이 청소하시는 모습을 보시고는 더 신경 써달라고 부탁하셔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곳을 가더라도 지저분하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잖아요. 이모님이 우리 찜질방 얼굴을 닦아주시는 거예요. 앞으로 조금만 더 신경 써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청소하시는 분들끼리 합이 잘 맞아야 서로 의지도 되고 힘도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두 분이서 서로 소통하며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데 여기까지만 말씀드렸다. 기분 나빠하실까 봐 조마조마하는데, 화통하게 말씀하신다.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 얘기해서 알려줘야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더 신경 쓸게요"


휴. 다행이다. 그래도 잘 받아들여주셨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다.


"흡연실 환풍기를 닦고 싶은데 높아서 엄두가 안나."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




오시고 나서 환풍기는 한 번도 못 닦으셨다고 하셨다.

별안간 사다리를 타게 되었다. 그런 문제라면 내가 나서야지. 사다리 타는 사모님 출동!


청소이모님이 작은 사다리를 고르셨다. 그래서 들고 갔다. 그런데 흡연실 환풍기는 높이가 꽤 높아 작은 건 택도 없었다. 큰 사다리를 다시 가져왔다. 맨발로 조심스럽게 맨 위로 올라가 환풍기를 닦기 시작했다. 물티슈로 닦아보는데, 닦이긴 하는데 이상했다. 환풍기 구멍에 먼지가 가득 차 있어서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열 수 있을까 하며 그냥 손으로 밀어 넣어 먼지를 꺼내었다. 겉에만 닦아 볼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뒤로하고 환풍기를 여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왼쪽으로 돌리면 열림,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김이라는 표시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처음에는 열리지 않았는데 결국 '딸깍' 열렸다. 열리고 나니 더 충격이다. 먼지들이 쌓여서 두툼하게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술빵 같았다. 두툼하고 포슬포슬한 촉촉한 술빵 모양의 먼지꽃이 피어있다. 이 술빵 먼지들이 환풍기를 제대로 막고 있었다. 대략 두툼한 먼지를 제거하고 청소 이모님께 드렸다. 그리고 환풍기 안쪽의 먼지도 드러냈다. 그제야 환풍기 바람이 느껴졌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아주 커다란 술빵 같은 먼지를 제거하고 나니 막혀있던 관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깨끗해진 환풍기


'담배를 피우게 되면 이렇게 폐 안에서 술빵 같은 먼지들이 쌓여서 폐를 망가지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주변도 닦으며 누랬던 색깔이 제 색깔을 찾아간다. 하얀색이었지. 천장에 있는 환풍기 이기 때문에 물티슈로 닦아도 먼지가 풀풀 풍겨 머리 위에 쌓이고 눈에도 들어가려고 한다.




공중에 떠서 양쪽 다리에 의지 한채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다리 위에서 작업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다리 맨 위에 다리는 매달려 있는데 고개는 들고 있으니 자세를 바꾸기도 쉽지 않다.


다른 쪽도 닦아 볼까 자세를 트는 순간 사다리가 휘청. 그대로 넘어질 뻔한다. 사다리는 잘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해진다. 아찔했던 엉덩방아 사건이 떠오르며 다시 내려와 사다리 양쪽 다리의 수평을 맞추고 고정시킨다. 흔들리지 않은지 확인한 후에 다시 올라간다.


부항하는 이모님이 말씀하신다.

"머리에 먼지 다 묻겠는데 머리에 뭐 쓸 거라도 갖다 줘? "

"아니요. 괜찮아요. 다 하고 머리 감으면 되죠 " ^ ^  


엄청 쿨한 척했다. 2개의 환풍기와 스크린쿨러를 닦고 천장에 있는 먼지들을 닦았다. 그리고 깨끗해진 환풍기를 다시 장착하고 마무리가 되었다. 그제야 사다리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쑤셨다. 사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고 오래 서있으며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목이 칼칼하고 눈도 찝찝했다. 뒷목은 더 뭉친 것 같고 온몸이 좀 쑤셨다.


청소를 다 마치고 배가 너무 고팠다. 뭘 먹을까 잠깐 고민하다 시원한 냉면과 까르보나라 돈가스를 먹었다. 개운해진 마음으로 먹는 만찬. 힘든 작업 한 나 자신 칭찬해하며 맛나게 먹었다.(팔이 후들후들해서 젓가락질이 잘 안 되기는 했지만)



 냉면집 옆에 작은 옷가게에서 반팔티가 6800원에 팔고 있다. 남편에게 고생한 나를 어필하며 옷을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6800원짜리 티셔츠를 5개나 획득했다.(이것도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위안하며)


티셔츠 5장에 '다음에도 사다리 올라가야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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