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노래선물상자

by 초아


353일간의 유럽살이.

가지각색 다양한 건물과 햇빛이 내리쬐는 골목들을 담은 사진들, 나의 한 걸음 한 걸음과 함께 담긴 바람내음과 미숙한 감정이 스며든 13개의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365개를 채우지 못한 게으른 100여개의 일기를 들고 한국으로 가는 공항에 앉아있다.

선물같았던 한 해였다.

새로운 항해에서 나홀로의 여행이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울 수 있었던 건 내 플레이리스트와 아버지의 서랍 속 방치되어있던 흰색 유선 이어폰 덕분이었다.

인생이 버거울 때에도,사랑에 빠질 때에도, 이제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때에도 노래를 꺼내 들었다.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스스로와의 대화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내 몸의 주기가 있다는 걸 느꼈다. 어떤 간지러움이었다. 한달 주기로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은 꿈틀거림이었다.

자연스레 몸의 욕구를 대변하는 노래를 하나 찾아 반복적으로 들었다. 노래로 표현하는 나의 아우성이었다.

이는 그 시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피하고 싶은 순간을 충분히 바라보게 했으며 순간순간의 감정에 취해서 더 행복해지고 더 슬퍼지게 하기도 했다.

스쳐가는 감정들을 남김없이 영위하는 기분.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후회없이 가득 채우는 기분.

먼 미래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를 위해서, 대한민국이 아닌 새로운 땅에서 드디어 온전히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아, 착륙했다. 지구에.


12개의 노래를 우연히 마주치면 기억의 조각조각들이 유럽의 장소와 감정들이 함께 밀려 들어온다.

아득히 멀어져버린 그 순간들이 되살아나 시간여행을 하게된다. 인생을 좀 더 살아본 선배가 후배가 겪은 청춘과 낭만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불현듯 독일로 워홀을 떠나,

살아갈 집을 찾으며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돌아올 집의 소중함을 느끼며,

에펠탑을 보며 20대의 끝자락에서 미래의 내가 꾸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반복되는 규칙적인 일상을 만들고,

교회에 다니며 근거가 없어도 믿음이 주는 힘을 의지하고,

2평 남짓한 스시집에서 일하며 나와 전혀 다른 뇌구조를 가진 존재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보고,

첫 휴가에서 인종이 다른 친구들로부터 휴식의 의미를 공부하고,

루인강을 뛰며 행복이라는 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비자문제를 해결하며 흘러가는 대로 둬야만 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일기를 쓰며 지난 날의 나의 과거를 용서하고,

한국에서 한 연예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어른의 의미를 생각하고,

독일을 떠나며 태양은 다시 떠오르니 또 한번 시작해보자고 다짐하고,

다합 여행에서 저마다의 이유들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한계를 고민한다.

무식하게 시작했던 용기가 준 경험들, 아팠지만 뜨거웠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질때면 노래 선물 상자를 자주 열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