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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Feb 01. 2023

소녀 윤경




소녀의 삶은 애처로웠다.

어린 소녀에게 붙여주기 미안할 정도로 기구한 삶이었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잔칫날은 동네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일손을 보태고, 가족들 몫까지 음식을 넉넉히도 챙겨 돌아갔다.


소녀는 그 옛날 첫째 딸로 태어났으나 미움 한번 받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를 쏙 빼닮은 딸아이를 이뻐라만 했다. 무릎에 앉히고는 요리보고 조리보며 어르고 달랬다.     




행복할 때 불안이 떠오른다면,

녀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부터다.     


6.25 사변이 터지고, 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휴전의 소리가 들려올 즈음, 녀의 삼촌 둘은 북으로 내달렸다. 목에 칼을 디밀었기에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지켜낸 목숨을 또다시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녀의 아버지는 동생들과는 달랐다. 밤낮 가리지 않고 소나무 잔가지 땔감 속에서 숨어 지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잔가지 속을 무차별하게 찔러대는 칼을 피해 색출만겨우 면했다.


소녀의 할머니 가슴에는 북으로 도망친

아들들이 남기고 간, 집채 만한 돌덩이가 얹혔다. 할머니는 아들들을 찾으러 가자며 소녀의 아버지를 보채고 또 보챘다. 배고픈 아기 마냥.


소녀의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와 단둘이 떠났다. 동생들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말을 남긴 채.      




그리고 그 길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머나먼 길이 되었다.      





소녀 윤경은 아비 없는 아이로 자랐다.

녀의 엄마는 과부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아직은 향기를 풍기는 나이였다. 엄마는 그렇게 새 남자를 받아들였다. 남자는 집안의 방앗간 일을 돕던 일꾼이었다. 그것도 이미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던 남자.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내쫓을 명분이 충분했다. 할아버지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 며느리를 내쳤다.

소녀 윤경과 함께.


녀는 의지할 사람이라곤 엄마밖에 없었다.

작은 의문 하나 품지 않았다. 엄마의 길을 쫓았다. 이때부터 소녀는 배고픔과 설움, 가난과 비난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래도 소녀는 자신을 진흙창에 내던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을 고결하게 내딛으며 나아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나마 남아있던 소녀의 아버지 몫의 재산도 할아버지의 작은마누라 자식들이 가져갔다. 억지로 도장을 뺏어내고, 공무원과 판을 짜, 밥풀 하나 남겨두지 않고 싹싹도 긁어 갔다.     



소녀의 어머니는 새 남자와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쌍둥이 아들을 둘이나. 소녀는 어머니는 미웠지만 배다른 동생들은 업고 키웠다. 제 자식 마냥 이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남자도 그리 좋은 어른은 아니었다. 소녀에게까지 검은손을 뻗치려 했던걸 보면.


이제 소녀에게 집이라고는 어디 한 곳 마음 편히 몸을 뉘일 곳이 없었다.      


집에서 도망치다시피 한 결혼은 시작부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제는 좀 괜찮아져도 좋으련만.

좀처럼 소녀에게서 어두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더랬다.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만 갔다.

남편도 소녀의 아픔을 끌어안을 만큼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부모님에게도 봄날의 햇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소녀 윤경의 삶은 그녀의 어린 자식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달팠다.     




소녀의 깊고도 짙은 이야기를 나의 얕은 필력으로는 감히  풀어낼 수가 없다. 그것이 원통할 뿐이다.


처자식을 두고 북으로 동생들 찾아 나선 아버지,

소녀엄마로만 남는 것을 거부한 엄마,

음침한 엄마의 새 남자,

손녀를 내친 할아버지,

남은 재산 몰수해 간 배다른 작은 아빠들,

주홍글씨 새기듯  빨갱이 가족이라 

비난하던  마을 사람들,

매몰찬 시부모님과 시댁 식구들

그리고

지옥의 검은 그림자 같던  남편까지. 


소녀 윤경은

이 기막힌 이야기들을 이제는 담담하게만  읊조린다.   

그런 난, 소녀의 이야기가 너무나 안타까워 자꾸만 되새기게 된다. 미미한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에 냉랭한 가슴이 된다.


소녀 곁에 단 한 명이라도 '진짜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곁에 박동훈 아저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녀 윤경을 만난 뒤로는

그냥 나이만 먹는 어른이 아닌  진짜 참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내가 힘없고도 약한 것에 자꾸만 눈길이 머무는 이유다.






소녀 윤경, 이젠 좀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럼, 이젠 진짜 행복하자.

모든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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