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언니들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코로나로 캘리그래피 동아리마저 한겨울 뜨거운 물 마냥 식어가던 그때. 끝낼 듯 말 듯 밀당하던 코로나를 덥석 끌어안은 건 캘리그래피 상급자반이었다. 나는 입문자반이었지만 상급자반 회원들의 흔쾌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거기서 만난 첫 번째 특별한 언니는 정숙언니다.
매력적인 코맹맹이 소리에 웃을 때는 눈이 안 보이는 하회탈 미소. 누구를 만나건 몸에 밴 환대의 태도는 나도 함께 몸을 기울이게 한다. 그날 그녀는 캘리 수업에 잠깐 들렀고, 나를 활동가의 길로 안내했다. 친절한 그녀의 설명에 고민은 조금도 없었다. 논스톱으로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주부에서 리딩인과 두런두런 선생님이 되었다. 지역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했다. 한참을 주부로만 살다가 다른 이름표를 달게 되니 하루하루가 통통 튀는 물방울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그림책 모임 <책모모>에 까지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 덕분에 그림책과 친구가 되었다.
두 번째는 선영언니다.
그림책 읽어주는 리딩인 활동에서 정숙언니의 짝꿍이다. 선영언니는 말발이 끝내준다. 정곡을 콕콕 찌르는 게 특기다. 하지만 그 말에는 날이 서있지 않다. 내뱉는 말투에는 온기가 깃들어 있다. 이렇듯 그녀의 매력은 도도함 플러스 다정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헤어질 때 아쉬워 뒤를 돌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일단 인사가 끝나면 앞만 보고 직진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무심한 듯 쓱 건네지는 그녀의 마음에 울컥 감동할 때가 많다. 호들갑 떨지 않고 담담히 건네는 그녀의 마음. 두고두고 닮고 싶은 부분이다.
세 번째는 명흔언니다.
정숙언니의 소개로 그림책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만났다. 언니의 매력은 끊임없이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있다. 하루하루 쌓인 그녀의 루틴이 이제는 단단한 퇴적암이 되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녀는 주변을 관찰하고 그것을 꼭 글로 남긴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묻어 있어 참 정겹다. 읽는 내내 속이 편안하다. 그녀는 식물 사랑도 엄청나다. 누군가 버리고 간 화분에도 자꾸 눈길이 가는 그녀다. 외면받은 식물을 집으로 데려와 멋지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는 진정한 식집사랄까? 요즘은 서울과 영광을 오가며 부모님 생가를 단장하는 일에 열중해 있다. 그동안 곱게 모아두었던 꽃씨를 가지고 어떤 마법을 부렸을지 벌써 기대가 된다.
네 번째는 문숙언니다.
그림책 모임에서 활기와 긍정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녀는 일출 사진으로 우리 단톡방을 깨워준다. 언니네 집은 일출 명소가 따로 없다. 덕분에 맨날 눈이 호강한다. 언니가 올려주는 산책사진은 집콕을 좋아하는 나도 집밖으로 뛰쳐나가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또 내가 이사 갈 때, 집 밥을 한상 그득 차려준 그녀다. 밀키트가 판을 치는 세상에 집밥으로 마음을 전하다니. 새삼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는 남대문 꽃시장에 갔다며 단톡방에 꽃 내음을 가득 전했다. 노년에는 보통 자식들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던데, 문숙언니는 도리어 자식들이 엄마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섯 번째 언니는 윤아언니다.
자기를 언니라 했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사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어리다. 하지만 하는 짓은 꼭 맏언니 마냥 진국이다. 난 그녀가 목소리에 한껏 정성을 다해 그림책 읽어주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림책 잡은 손에도 자꾸 시선이 머문다. 자연과 접하고 노는 것을 즐거워하는 그녀이다. 즐거움의 순간들이 그녀의 손등에 까무잡잡하게 살포시 내려앉아있다. 훗날 펜션을 열거라는 포부를 가진 그녀. 이미 펜션 이름까지 떡하니 정해 놓았다. 그 이름도 멋들어진 ‘휘게 펜션’. 휘게는 아늑하고 기분 좋은 상태. 즉 가까운 사람들과 소박한 일상을 중시하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식 생활 방식을 말한다. 그녀와 찰떡같이 어울린다는 생각에 엄지가 추켜올려진다. 휘게 펜션을 느긋하게 걸어 다닐 생각에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지막 여섯 번째 특별한 언니는 또 한 명의 선영언니다.
언니의 목소리는 어찌나 고운지 모른다. 한 마리 꾀꼬리가 둥지를 튼 것만 같다. 여름이면 그녀 손에 얹어지는 붉은 봉숭아꽃물을 좋아한다.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염색을 안 한 거라 하지만, 나는 그녀의 희끗희끗 새치머리도 좋아한다. 사실 언니는 내 아이의 독서 지도자 선생님이었다.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림책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특별한 언니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난 그녀의 솔직함을 좋아한다. 내가 체면 차리느라 묻지 못하는 질문도 그녀는 서슴없이 묻곤 한다. 만날 때마다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싱그런 마음에 퐁당 빠지곤 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기 집에 돌아다니는 거미와도 대화를 나누며 공생을 자처하는 그녀다. 노년은 인세로 먹고사는 게 꿈이라는 그녀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지기를 바라본다.
이렇게 특별한 언니들이 나에게 왔다.
한 명도 아니고 각기 다른 매력의 그녀들이 종합선물세트 마냥 한꺼번에 왔다. 살아오면서 사람에 대한 좋은 경험이 많지 않았다. 관계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피로감과 실망감에 더 무게가 실렸다. 깊이는 얕고, 의문만 품은 관계를 간간히 유지해 오던 터였다. 그런 나를 그녀들이 완전히 바꾸어주었다. 사실 그녀들이 이 글을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마음 내키는 대로 ‘언니’라 불러댔으니 말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정중히‘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들이대기보다는 예의 한 스푼이 필요하다는 사실!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그녀들이기에 적당한 거리와 예의는 필수다.
이제는 멀리 낯선 곳으로 이사와 언니들을 만나러 가려면 큰 마음을 먹고 나서야 한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들의 매력을 떠올리며 조금씩 물들어 가려한다. 이번 주 토요일이 그림책 모임인데, 수요일인 오늘 마음은 벌써 설레는 발걸음을 한 발짝 땠다.
특별한 언니들, 내가 간다.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