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민 Jun 20. 2023

부탁이야

내가 끝까지 싸웠던 걸 당신은 잊지 마요.

 김승훈. 쉽게 잊어버리기 딱 좋은 평범한 이름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조용히 지냈다. 유난을 떠는 몇몇 찐따들처럼, 굳이 떠들썩하게 살 만한 이유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뭘 얼마나 먹는지, 지금 표정이 어떤지, 왜 평소보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는지, 외동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 속보보다 중요했다. 학교에서도 전교 1등을 향한 부러움과 시기,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오히려 조용히 숨어 지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승훈아, 남자는 세 번 운다, 그런 말 들어봤니? 하... 그거 다 헛소리다. 너도 아프면 아프다고 해. 짜증 나면 짜증도 팍팍 내고 말이야. 나는 남은 날 동안 그렇게 살다 갈 거야."


 "... 갑자기 왜요? 평생을 참으면서 살아오셨다면서요? 저라면 이제 와서 그러기는 싫을 것 같아요."


 "글쎄... 억울하지 않니?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고통받으며 가야 한다니... 게다가 병원 사람들 봐라. 죽어가는 사람을 물건 다루듯 하잖아. 도무지 진심이 안 느껴져. 아픈 환자들이 씻지도 못하고 죽어가는데 화장 떡칠하고 술집 년들처럼 향수 냄새나 풍기고... 우리는 밥 한술 넘기는 게 힘에 겨워 해골처럼 말라가는데, 지들은 틈만 나면 간식 처먹으면서 희희낙락, 참, 꼴도 보기 싫어."


 "... 저도 이렇게 죽는 건 슬퍼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쓰며 살진 않았겠죠. 그렇다고 세상 모두 제 손 잡고 슬퍼해 줄 리 없잖아요. 엄마, 아빠가 저 몰래 우시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 모습 그대로 지내는 것밖에요."


 종훈 아저씨가 임종실로 옮기신 후로 이따금 찾아가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6인실에서 같이 지낸 게 고작 며칠이었지만 아저씨는 내게 유난히 따뜻했다. 학교에서 소란을 피우던 아이들도 각자 사정이 있었듯, 아저씨에게도 병원에서 유난을 떠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던 거다. 아저씨의 기대와 달리 재수까지 시켜줬는데 지방대에 겨우 합격하고, 주말에 집에 오면 게임하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아들, 아들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한 얼굴만 반반한 아내, 이제는 자신에게 영 무관심한 의료진까지, 세상 모두를 증오했다.


 지원 선생님이 붙임성있게 말을 건네곤 했다. 오늘 날씨는 너무 덥다, 구내식당 점심밥은 정말 맛이 없었는데 환자식은 잘 나왔더냐, 그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을 왜 안 보냐, 명문대 다녔다더니 공부만 해서 TV는 싫어하냐, 오지호 너무 잘 생겼다, 한예슬 같은 스타일을 남자들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 수다가 나를 향한 동정인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어느새 지원 선생님이 휴가라도 가면 허전하다.


 미영이는 미래에서 온, 사람 형상을 한 로봇 같다. 지원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도 언행도 노숙하다. 웃는 근육이 없는 건지 늘 무표정에, 히크만 카테타 넣은 부위는 어찌나 박박 닦으며 소독을 하는지, 감염이 생길까봐 철저히 소독을 해야 한다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해 가며, 나한테 설명을 하는 건지, 간호사들이 보는 매뉴얼을 혼자 읊어대는 건지, 매사에 고집스럽다. 밥을 얼마나 먹는지 식판을 확인하러 오겠다는 둥, 며칠 전보다 수척해 보이는데 몸무게에 혹여 변화가 있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등과 배에 청진기를 대 보고 두드려 대고 난리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이 친구의 특기다. 헌데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박미영 선생님’은 내 마음속에서는 미영이다. 


 나이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이 두 간호사들은 분명 내 또래일 것이다. 얘들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생각난다. 지금쯤 애들은 뭘 하고 있을까. 시한부가 되어 병원에 드나든 지 1년 반이 되어가니, 얼마 전 제대한 호진이나 윤우만 가끔 찾아올 뿐 친구들 발길도 끊겼다. 군대 가고 취업 공부하고 다들 바쁘게 지내는데, 내 시계는 병실 안에서 멈춰 버렸다. 아니 몇 배로 빨리 흐른다고 해야 맞는 걸까.


 요즘은 눈이 침침해서 책 읽기도 힘들다. 금방 피곤하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다. 엄마한테 들키기 싫어서 조선 시대 선비처럼 천천히 걷는다. 밥공기는 최대한 비우려고 노력하지만, 소화가 부쩍 안 된다. 불편한 곳이 있냐고? 너무 많아서 탈이지. 요 며칠 전, 승훈 아저씨가 가고 비어 있던 자리에 멀끔한 녀석이 입원을 했다. 비밀이 많은 녀석이었다. 우연히 그 놈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나는 더욱 굳게 입을 닫아야 했다.


* 사진: Unsplash (Saad Chaudhry)

이전 08화 고장 난 산소 마스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