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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그를 만난 건 피렌체에서였다.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온 그는 빛이 났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열린 광란의 밤에서, 그의 그룹과 와인을 마시고 음악과 환호성 소리를 피해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눈길을 빼앗기고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내가 이쪽 취향일 거라고, 꿈도 안 꿔 봤다. 나를 잡아줄 친구들도 없었다. 외롭게 그를 향한 미친 마음과 싸웠지만 끝내 항복했다. 여성을 잘 알지는 못 하지만 그와의 사랑은 몇십 배 강렬했다. 그는 내 안의 남자를 나보다 잘 알았고 온몸 구석구석 잠자고 있던 욕구와 감각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내 영혼의 단짝을 만난 것 같았다.


 며칠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맞아주는 엄마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기에는 밝은 곳에 내어놓기 부끄럽고 입에 담지 못할 죄악이었다. 그래, 잠깐 악마를 만났었다. 아니 현실이 아니었을지도, 악몽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나만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는 속삭였다. 항문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희생이 우리의 사랑을 완전하게 만든다고. 그 죄악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변에 선홍색의 피가 섞여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죄를 갚는 심정으로 말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친구들로 만나기로 했었다.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서둘러 화장실에 갔는데 피를 쏟고 쓰러지고 말았다. 나를 찾으러 왔던 친구들이 발견하지 않았다면 화장실에서 황천길로 갈 뻔했다.


 응급실 의사는 한 번에 알아봤다. 친구들에게 잠깐 자리 비켜달라고 하더니 항문으로 성교한 적이 있었냐, 그게 언제였냐고 무덤덤한 얼굴로 물어봤다. 몇 번 만에 이렇게 될 수 있냐고, 나는 억울해서 반문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필요한 검사들을 처방했다. 다행히 에이즈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있는 PC로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복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이 희생이라던 그에게, 나의 희생을 알리고 싶어졌다. 이미 자전거 여행 무리와 난잡한 사랑을 나누느라 나를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화가 났다, 나만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지석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지금 입원한 걸 보고서도 잘 지냈냐는 말이 나와?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


 “내가 연락하면 너한테 피해가 갈까봐... 알잖아, 우리가 얽매이지 않는 거. 그게 철칙이라고.”


 “철칙? 좋아하네. 너희들은 쓰레기야. 사랑이라고, 희생하라고 하면서, 쿨한 척 이 남자, 저 남자랑 붙어먹는 거잖아. 사랑이 뭔지는 아니? 책임감 없이 뜨내기 생활을 즐기면서, 차별받는 소수자, 약자 행세하지 말라고!”

 

 “...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 네가 아프다는 소식 듣고 나도 놀랐어. 내가 HIV 감염인인 거, 너한테 미리 밝히지는 못했지만, 콘돔을 철저하게 썼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잠자리한 날 너한테 이상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어. 미안해.”


 호감으로만 보였던 그의 핏기없는 얼굴이 구차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를 만나면 꼭 해야겠다고 적어두고 연습했던 말을 다 뱉어내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허탈함만 밀려왔다.

 “그냥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격한 대화를 마치고 환자 휴게실 문을 뻥 차고 나가려는데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앉아 있던 소파 뒤편 책장 앞에서 숨죽이고 서 있던 그 녀석을. 제길.


 “김승훈, 너 우리 엄마 봤지? 너희 엄마만큼 아들 바라기야. 여기 오기 전에 두 군데서 퇴짜 맞았거든. 해 줄 거 없다고. 의사 앞에서 빌더라, 제발 퇴원시키지 말고 치료 좀 더 해 달라고. 엄마가 나 때문에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초면에 미안한데, 비밀 좀 지켜주라.”


 “... 그래. 뭐, 못 들은 걸로 할게.”


 얼마 뒤, 엄마에게 온갖 핑계를 둘러대고 병원에서 도망치듯 퇴원했다. 시한부 환자에, 도망자 신세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공부는 못 해도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아빠처럼 평생 변변한 직장도 없이 엄마 등골 빼 먹으며 살기는 싫었다. 술 먹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객사할 뻔하고, 집에 와서 밥이나 축내는 개차반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딱 그 꼴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나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 사진: Unsplash (lucas clary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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