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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착하지, 재순아

 그는 우리 사진관을 자주 찾던 동네 총각이었다. 니콘 카메라를 신주 모시듯 소중히 품에 안고 와서 필름을 맡기고 가는 모습이 뭇 여성들 못지않게 참했다. 그가 사진관 밖으로 나서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남자가 저리 다소곳할까.


 그런 남자를 다시 만난 건, 맞선 자리에서였다. 어? 어! 반가운 마음에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차원의 대화가 자연스레 오고 갔다. 놀랍게도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녔고, 세상 참해 보였는데 데모 잡으러 다니는 경찰이었고, 긴 대화를 하다 보니 경상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제 소개를 하자면요, 음, 서대문 근처에 있는 경진여고를 나왔고요. 삼정여대 가정과 1학년을 다니다가 고만두었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학비 낼 형편이 안 되어서요. 곧 법무사 사무소로 옮길 참이고, 잠시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틈이 나면 책을 읽는답니다. 혹시 아나요? 천경자 같은 여류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요.”


 “그러믄, 곤란한데요. 여류 작가가 되어서 담배 태우고 아이 낳는 것도 거부한다면요. 하하.”


 “어머, 그런 얘기가 될 수도 있군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맞선이나 보러 다니게 될 줄이야, 아버지가 이런 상황을 아셨다면 불호령을 내리셨겠지만, 슬프게도 하나님 곁으로 먼저 떠나셨다. 벌써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소위 짭새 아내가 된다니.


 대학을 그만둔 것도 내 뜻은 아니었다.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다니고 싶다. 너무 화가 나고 절망한 나머지 친구들과도 절교하다시피 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하하 호호하는 동무들의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나서 눈에서 불꽃이라도 튈까, 그런 마음을 들킬까 싶어 겁이 났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고 싶었는데 사진관이 제격이었다. 교회 권사님이 운영하시는 사진관이라 특채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손님이 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옷을 받아 걸고 머리 손질 시중드는 게 다였다. 가정과를 다니면서도 늘 궁금했다. 여길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졸업을 하게 된다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겠지.


 언니는 영리했다. 사립대를 다니다가 교원 양성 과정에 합격해서 인천교대로 옮겼다. 대학교육이 쓸모 있으니, 없는 형편에도 계속할 명분을 얻었다. 언니는 학교를 다니고, 나는 그나마 여대생이었다는 타이틀 덕분에 어느 법무사 사무소 여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언니에게는 우리 가족만 아는 비밀이 있다. 알려지면 집안이 콩가루 소리를 들을만한 비밀이라, 출가외인인 큰 언니에게도 숨기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언니는 옛 남자친구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실은 엄마, 그리고 우리 자매들에게 그 오빠가 유일한 버팀목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가 애 둘 딸린 유부남이라는 거다. 심지어 그 언니와는 친구의 친구쯤으로 어렴풋이 아는 사이이다.


 생활력이 없는 엄마 대신 어린 동생 여고 졸업이라도 시키고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오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자 둘이서 노모와 어린 여동생을 건사하며 살아남으려면, 언니가 간통죄로 잡혀가는 꼴을 보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면전에 욕하고 침을 뱉더라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 되더라도, 아무래도 버티는 수밖에 없다.


 오빠는 언니가 원래 다니던 대학 동기였고 연인 사이였지만, 집안끼리 혼사를 약속한 처자와 결혼을 했다. 그 오빠가 그렇게 다른 여자에게 간 후 언니는 아버지의 병환 간호까지 맡게 되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저러다 사람이 말라죽는 거 아닌가, 잘못 말을 건넸다가 연탄가스라도 마실까 걱정하던 어느 날부터, 언니는 그 오빠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말리고 싶었지만 밝게 웃는 모습을 되찾은 언니에게 다시 불행을 강요할 엄두가 안 났다.


 언니는 그 오빠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 그리고 소위 운동권 대학 후배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즈음 법무사 사무소로 이상한 전화가 걸려 왔다.


 “윤재순 씨가 거기서 일합니까?”


 “네... 전데요. 그른데 누구셔요?”


 “아, 그래요? 경고하는데, 당신 행실 조심해.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들고 얼어붙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미스 윤,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걸려 온 전화예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협박 전화라니. 그것도 내 이름, 직장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심할 만한 사람은 언니뿐이었다.


 “언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협박 전화받을만한 일을, 내가 했을 리 없잖아?”


 “이년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너인 줄 착각한 놈들이겠지. 설마 네 이름 팔고 다녔을까 봐, 나 의심하는 거야? 참, 기가 막혀서!”


 엄마가 말렸지만, 그 간의 울분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서 걷잡을 수 없었다. 유부남과 교제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 이름을 대고 운동권 여대생 행세를 했던 언니를 어찌해야 할까. 그날부로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직장을 그만두고, 몇 해 전 일하던 사진관에 숨었다. 거짓 핑계는 현실이 되었다. 지독한 우울, 혹은 무기력의 늪에 빠져 몇 년을 암흑 속에서 살았다.


* 사진: Unsplash (Martino Pietrop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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