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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말을 할 수가 없어

 언니, 내 말 들려? 당신은 내 목소리 들리나요? 난 지금 말을 잃었어. 암세포가 머릿속까지 장악한 거겠지. 의사, 간호사가 말하는 거 다 들었어. 말은 못 해도 내 의식이 초능력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어. 책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이렇게 간절하니까.


 언니, 내가 못 한 말이 있어. 내가 모았던 돈, 애들 아빠한테 모두 줘. 그동안 처가살이하면서 고생 많이 했던 거, 언니도 알지? 시골 사람이라 우리랑 생각이 다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더라도, 애들만큼은 책임감 있게 돌볼 거야. 예전에 언니가 내 이름 팔고 다녀서 협박당하고 숨어 지내고, 그러면서 몇 년씩 힘들어했던 거, 다 용서해. 언니도 나한테 섭섭한 감정 털어버리고 용서해 줄 거지?


 여보, 결혼생활 내내 다정하게 못 대해줘서 미안해요. 당신이 사무실 여직원과 한동안 좋아 지낼 만했어요. 얼마나 정이 그리웠으면 그랬겠나, 용서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그 여직원이랑 잘 되어서 우리 아이들 잘 키워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헤어졌나요? 아무튼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해요, 나한테 미안한 마음도 보태서 잘 키워야 해요. 당신도 꿈꾸던 대학 공부 꼭 하시고, 아이들 영어 공부도 시켜주고 유학도 꼭 보내주고요.


 얘들아, 엄마가 너희를 두고 먼저 떠나서, 정말 미안하다. 내 영혼이라도 어딘가에 남을 수 있다면 너희를 지켜보고 응원할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골몰히 생각에 잠기는 우리 미영이, 너는 아마도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우리 진영이도 나이에 비해 말도 잘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아서, 멋진 여성으로 크겠지. 무엇보다 건강해야 해. 내 생명이 꺼져가지만, 나의 강한 의지를 너희에게 보태주고 떠나마.


 엄마! 큰오빠가 백혈병으로 제일 먼저 떠나고, 그다음은 아버지, 이제는 내가 엄마 곁을 떠나게 됐네요. 엄마가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슬퍼할 걸 생각하니 내 가슴도 찢어져요. 대학 그만둔 거, 돈 벌러 다닌 거,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았어요. 요 몇 년 힘들어했던 거, 알고 보니 몸이 이렇게 병들고 있어서 그랬나 봐요. 엄마나 언니 때문이 아니고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엄마가 아이들하고 박 서방 잘 보살펴 주세요.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고, 아주 나중에 만나요.


* 사진: Unsplash (Pawel Czerw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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