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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Nov 28. 2022

후회가 된 마지막 인사

영화 '안녕 헤이즐'을 보며 너를 생각했어.

 암에 걸린 스무 살 남짓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죽음에 의해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 처음부터 비극일 걸 알면서도 간절히 기적을 바라게 되었던 그런 이야기. 그 아이도 남자 주인공처럼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소년이었다. 암에 걸린 것마저 같았다. 그는 대장을 잘라내고 배에 인공항문을 내었다. 한때 매끈했을 복부에서, 하루 종일 찔끔찔끔 변과 가스가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면회라도 오면 자기 변 냄새를 맡게 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그 아이가 다시 병원에 왔을 때 그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입원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몇 주 전 병원 근처에 놀러 왔다며 병동 간호사실에 잠시 들렀었다. 그 또래의 평범한 모습, 생기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얼마 남지 않았을 그의 시간이 야속했다.


 다행히 임종실이 비어 있어서 예민해진 그 아이와 엄마가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누워서 지냈다. 엄마는 전보다 더 불안해했고, 아들은 나날이 짜증스럽게 변해 갔다. 덥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암세포가 옮겨붙은 곳에서 진물이 많이 흘러서 드레싱을 자주 갈아야 했다.


 "선생님, 내 배, 너무 징그럽죠? 냄새도 지독한 거 같아요."

 이런 모습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했다. 소독할 때 주치의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했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나가라고 했다.


 며칠 사이 그는 더 수척한 모습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며칠 사이 몇십 년이나 늙어버렸다. 맞아,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했지. 활력을 잃은 세포들이 떨어져 내려 사방에 흩뿌려진다. 베개 덮개와 시트를 교체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수북이 각질이 쌓여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소화기관도 점점 일을 하지 않고 자연히 입으로 무언가 먹지 못하게 되면서 피하지방은 자취를 감춘다. 아무리 고농도 영양제를 투여해도 부질없다. 얼굴의 모든 굴곡이 드러나고 앙상한 가슴과 복부, 탄력 없이 퉁퉁 부은 다리가 이 세상과 이별이 가까웠음을 알린다.


 요 며칠 그는 약이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밤낮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암세포가 잠식한 육체의 고통뿐이랴. 자신의 죽음을 알아버린 영혼이, 슬픔에 갉아 먹히는 고통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상에서 영영 잊힐 거라는 게, 고통스러울 만큼 슬픈 걸지도.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주치의는 모르핀 수액을 처방했다. 그게 환자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고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도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아들 좀 깨워 주세요. 인사를 제대로 못 했어요.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엄마의 요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르핀 투여는 보호자도 이미 동의했던 사항이었다. 이렇게 서서히 임종을 맞게 된다는 걸, 기나긴 병원 생활을 하며 환자 엄마들에게서 듣고 어깨너머로 보면서 몰랐을 리도 없다. 그녀는 아들을 빼앗아 가는 존재와 외로이 싸우는 전사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으으윽... 날 왜 깨웠어, 어? 어? 엄마가 나 대신 아파할 수 있어?”

 모르핀의 효과가 순식간에 걷히자 약으로 눌러 놓았던 통증이 소용돌이치며 지석이를 순식간에 먹어 삼켰다. 그는 이 세상을 반쯤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단 몇 분 만에 수개월 치 통증을 고스란히 되찾고 울부짖는 악마였다. 이 세상에 어떠한 미련도 없는 아들을 보며, 엄마는 울면서 말했었다.


 "선생님, 다음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좀 말려 주세요. 제가 또 깨워 달라고 그러믄, 꼭 좀 말려 주세요."


* 사진: Unsplash (Pars Sa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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