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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에휴, 미영은 가슴을 쳤다. 분명히 정형외과 병동이라고 하지 않았나. 또 암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단명도 몇 번 못 들어본 아주 희귀한 케이스란다. 의사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사례보고서 하나쯤 써서 논문집에 실을 수 있겠지. 미영에게는 임종을 앞두고 손과 마음을 아주 많이 써야 하는, 부담스러운 환자였다.


 예전에 만났던 이종훈 씨가 생각났다. 입원 당시에는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는데, 50대 환자가 떠오르는 외형을 보니, 병세가 꽤 깊음을 알 수 있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넓적다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 응급실 진료를 받았고, 예상보다 큰 혈종을 발견한 의사는 응급수술을 권했다. 그게 암 덩어리였다는 걸 몰랐던 거다.


 가뜩이나 힘든 치료를 받는 동안 혈종을 제거하려 절개했던 부위는 도통 아물지 않았다. 암세포가 가득한 근육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왔다. 지금은 이틀에 한 번 수혈을 받아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상태였다. 혈관을 잡을 수 있는 팔은 이미 벌집이 되어 있었다.


 중심정맥관(약물주입이나 대량수혈을 위해서 신체 중심에 있는 큰 혈관 주입로를 확보해 두는 것)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이틀에 한 번 주사를 놔야 해야 했다. 이미 식사가 어렵고 걷지도 못하고 쇠약한 몸에서 혈관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육안으로 봐도 묽어진 혈액이었기에 채혈이 가능했고 딱딱하게 만져지는 혈관들이 용케 버티고 있었다.


 예전처럼 분노 투사 대상이 되기 싫어서 무관심한 척했다. 꼭 필요한 처치를 할 때에는 온 힘을 다해 친절과 성의를 보였지만, 될 수 있는 한 거리를 두었다. 매일 같이 수술 마치고 올라오는 환자들, 입퇴원 환자들 돌보기만 해도 바빴고, 신규 후배들이 사고라도 칠까 단속하고 퇴근 후에도 급한 연락이 올까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여유가 없었다.


 순수함과 열정 넘치던, 안전한 선을 모르고 철부지처럼 행동하던 박미영 간호사는 이제 없었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살피고 영혼까지 돌보는 간호를 하고 싶지만, 그런 이상을 비웃듯 그녀의 일터는 환자와 보호자 밥을 신청하고 원무과 서류를 챙기고 수가를 맞추고 잡스러운 행정업무에 더 많은 노력을 쏟으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아무리 외면하려 해 봐도, 신혼 초 남편이 아프기 시작한 탓에 병실에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딱 그녀 또래의 보호자가 안쓰럽다. 장거리 연애를 하던 그들은 결혼식을 먼저 올렸고 한 곳으로 살림을 합치기 전까지 KTX를 타고 2시간씩 각자의 자취방에서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었단다. 살 집 계약을 하려다가 매도인이 마음을 바꾸어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주저 앉았던 그 때, 남편이 아파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였다.


 지현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덤덤하게 미영에게 들려주었다. 그게 무슨 흉조였던 거 같다고. 그 후의 삶은 미영이 봤던 다른 보호자들의 것과 닮아있었다. 남편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자취방에서 음식을 해 나르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고,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남편과 가족들이 호스피스에 거부감이 커서 가지를 못했단다. DNR(‘Do Not Resuscitate’의 줄임말, 임종을 앞둔 환자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결정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는 것)도 남편을 포기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단다.


 나라면 지현과 같이 죽어가는 남편 곁을 지킬 것인가, 미영은 생각해 본다. 지현은 아이도 없고 나이도 젊고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이 길지도 않다. 결혼식만 올렸을 뿐, 법적으로 갈라서면 깨끗하다. 하물며 정리할 혼수도 없지 않은가. 6개월 간 남편 수발만 하며 생기를 잃은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조용히 결혼생활을 끝내고 기쁨이 가득한 세상으로 떠나고 싶지 않을까. 이미 70대 할아버지처럼 깡마르고 까맣게 죽음으로 멍이 든 한 인간에게 못 할 짓 같아서? 아니면 자신에게 쏟아질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스물일곱을 절반쯤 갖다 바쳤는데 지현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언제 허망하게 끝날지 모르는 병원 뒷바라지를 하는 게 자신에게 정말 못 할 짓 아닐까. 누구보다 내가 중요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닐까. 혼자 골몰히 생각하던 미영은 잘 모르겠다며 미친년처럼 고개를 저었다.


* 사진: Unsplash (Oscar K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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