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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수액을 맞으며 줄담배를 피우다

 정준은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겼다. 인생에서 뭐 하나 잘한 게 없다.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정의로운 기사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국장이 주문하는 대로 승진하기 좋은 기사만 골라 썼다. 젊은 피가 끊던 시절에는 동료들과 모여 자주 핏대를 올리며 밤새 떠들어댔다, 시대 정신이 어쩌고 하며. 그래도 살아야 했다. 잘 사는 놈들은 이런 걱정 없이,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도 그렇게 못할 건 없었다.


 사랑도 그랬다. 평생 함께 하고픈 상대를 찾았지만, 가세가 기우는 집안과 얽혀 고생하며 살기보다 장래가 보장되는 결혼을 선택했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천성적으로 실리를 따르고 사리 분별하며 살았다. 몇 년간 자식 낳고 잘 살았다.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도리를 했기에 죄책감은 없었다. 정순이에게도 미안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실리파 쪽이니 내 선택을 존중할 테고, 나 없이도 든든한 직장을 내세워 더 잘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계산대로 되지 않았다. 가영이와 이혼하면서 집안끼리 등을 돌리게 되었고, 더구나 내 불륜 탓이었던 만큼 체면을 생각해 고발하지 않은 장인에게 감사 인사까지 올려야 할 판국이었다. 아이들을 빼앗겼어도 항의할 명분이 없었다.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내 심복 같은 녀석들과 작은 잡지사를 차렸지만 2년도 되지 않아 말아 먹었다.


 얼굴 없는 대필작가로 회고록을 몇 편 썼다. 원고료로 겨우 잡지사 빚을 갚으며 정순이 집에 얹혀살았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새옹지마가 이런 것일까. 정순이와의 재회를 허락해 주었던 어머니는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까. 희망을 잃고 꺼져가던 딸년에게 극약을 처방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수단으로 들였던 게 내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남몰래 괴로워했다. 마지막 사업을 정리하며 친구들과 의절하다시피 되며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틈만 나면 피워댔다. 내 남은 생명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두 눈 버젓이 뜨고 지켜보는 심정으로, 담뱃잎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꺼멓게 녹아 부스러지는 장면을 하염없이 재생했다. 담배를 태우고 나면 달콤하다 못해 걸쭉하기까지 한 커피가 생각나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담배가 생각났다. 유일한 낙이었다. 아마도 암세포를 싹 틔운 검은 즐거움이었다.


 여느 때처럼 정순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잔소리를 한다. 담배 좀 그만 태우라며, 치료를 받으면서도 담배를 끊지는 못할망정 줄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타오르는 사랑을 공유하지 못하는 아픈 서방에게 해 줄 건, 잔소리뿐이다. 그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충실한 개로 남은 생을 살기는 싫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한 대씩 태운다.


* 사진: Unsplash (Pascal Me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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