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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넌 내가 죽으면 재혼할 거지?

 우리는 우연히 등산 동호회에서 만났다. 쾌활하고 운동하는 걸 좋아하던 이 남자가 좋았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내보였다. 좋은 대학을 안 나왔어도, 집에서 사업 뒷바라지를 해 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도, 지금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어도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해서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늘 이야기했다.


 물질만큼은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마음이 텅 비었던 나에게 딱 맞는 짝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도, 몸도 사랑했다. 주말 등산, 사이클을 마치고 그의 자취방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와의 세계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어차피 기대에 못 미친 딸년이라, 교양 있는 부모님은 역시 기준 미달인 사윗감도 감내했다.


 “문제만 일으키지 마라. 아빠, 이번에 총장 도전하는 거 알지? 교수들 사회가 어떤지도 알 테고. 너 대학원 때문에 남편 하고는 당분간 주말 부부로 지내는 걸로 했고, 지방대에서 시간 강의하면서 조용히 남편 뒷바라지하는 걸로, 소탈하게 사는 것으로 하자.”


 엄마가 아무리 모진 말로 상처를 줘도, 아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일관해도, 사랑이 있기에 참을 수 있었다. 불꽃처럼 타오를 때는 몰랐다. 그 끝에 남는 건 재 한 줌일 수도 있다는 걸.


 온 세상에 유부녀임을 밝히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지금, 나에게 남은 건 내 명예를 지키는 것뿐.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지고지순의 원형으로, 속히 다시 피어나기를 갈망하는 내면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젊은 오늘을 바치는 성모 마리아로 살아야 한다. 내가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회생 기회다.


 다행히 요즘은 즐거운 취미생활도 생겼다. 내게 이렇게 발칙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남편이 잠들어 있는 동안 병실에 들어왔던 남자,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등을 다독였을 때 알아차렸다. 나처럼 세상의 잣대 안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지만, 언제든 그 틀 밖으로 탈출하기를 엿보는 사람이라는 걸. 보호자 상담을 핑계로 병원 밖으로 불러냈을 때, 나는 대담하게 모텔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의 관계는 시한부다. 남편이 숨을 거두면 영영 볼 일 없고, 육체적인 즐거움과 일탈 외에는 미래가 없다. 의사 아내와 어린 딸을 둔 의사, 대학 총장의 외동딸이라는 각자의 정체성을 내려놓을 수 없기에, 딱 이 정도로 가볍게 스쳐 가야 한다.


 남편은 매일 같이 묻는다. 왜 내 곁에 있냐고, 나가서 친구들 만나고 놀고 싶을 텐데, 너 좋다고 달려드는 남자들도 많을 텐데, 그만 자기를 포기하라고. 몇 달 만에 죽을 사람이 된 자기 처지를 비관하는 대신,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데에 사력을 다한다.


 차라리 고맙다. 이렇게 미워하고 멀어지고 배신할 기회를 주어서. 너를 말끔히 잊고 너란 사람이 내 인생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물론 대꾸도 하지 않는다. 부정도, 긍정도, 원망도, 그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싶다.


* 사진: Unsplash (Jacquelin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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