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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un 20. 2023

염치없는 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꿈을 또 꾸었다. 자영에게 머리채를 뜯기고 바닥에 내던져졌다. 친구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어 옷을 다 벗겼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오늘 아침에는 울다가 깼다.


 “정순아, 너 무슨 꿈을 그렇게 꿔? 악몽 꾼 거니?”


 “휴우, 별거 아니야. 좀, 나쁜 꿈, 꿨나 봐.”


 엄마는 몰라서 물어, 죄지은 년이라 다리 못 뻗고 자는 거지. 그러게, 나 좀 말려 주지 그랬어. 40대만 되었어도 철부지라 이렇게 신파극을 시작했겠지만, 환갑이 다 되어서 드디어 불혹을 맞은 건지, 속으로만 삭이고 출근을 서둘렀다.


 그와의 사랑에는 언제가 불륜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자영이와 갈라선 지금도 그 표식은 지울 길이 없다. 정준이는 나와 결혼했어야 했다. 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비료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지만 않았어도 자영이쯤은 경쟁상대도 아니었을 거다. 자영이는 우리가 커플이던 시절부터 곁을 맴돌았다. 순진한 척 데이트에도 슬그머니 끼어들었고, 정준이 자취방으로 향하며 눈치를 주어도 끝까지 따라오곤 했다.


 거머리 같던 그년은 끝내 정준이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더니 정실 행세에 열을 올렸다. 예전에는 사귀었지만 결혼해서 안전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친구로, 애써 긴 수식어를 붙이며 그를 멀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과 살림을 압류당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자, 엄마가 나서서 그를 불러들였다. 우리는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


 금지된 사랑은 더 빠르고 무섭게 불이 붙었다. 기자 당직실, 여인숙을 전전하며 밀린 사랑을 나눈 지 세 달 만에 아이가 생겼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 출근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를 지웠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잠시 그에게 문을 걸어 잠갔다. 엄마는 말없이 몸조리를 맡아 주었다. 그와 만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나쁜 일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 후로 매일 피임약을 먹었다. 나와 가까워지는 동안 정준이는 자영이와 조금씩 멀어졌고 15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15년. 빼앗긴 내 사랑을 되찾는데 걸렸던 시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웠던 대학시절이 갑자기 붕괴되며 잃었던 그가 이제야 내게 돌아온 거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아파서는 안 되었다.


* 사진: Unsplash (Jametlene Resk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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