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주하는 시간
... 외로움은 무대 위도 객석도 아닌, 무대 뒤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수많은 역할로 존재하던 내가 아무 장치 없이 혼자임을 느낄 때 만나는 감정. 오랫동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가끔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위즈덤하우스 (2020), p.123.
구수하고 시큼한 소똥 냄새가 온 대기를 메우고, 풀벌레 울음소리가 밤을 세차게 채찍질하는 '시골'. 그곳에 혼자 남겨졌다. 시댁에 아이를 맡긴 '죄 많은 년' 생활 20개월에 이어, 코트 자락에 공룡 스티커나 붙이고 다니는 정신 나간 '워킹맘'으로 산 지 10년 만이었다. 그 소란스러웠던 무대에서 내려와 호사스러운 고독을 맞닥뜨린 곳이 하필 이곳이라니.
직장동료들과 점심시간에 탐방 다닐만한, 힙한 맛집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고, 저녁 회식이라고 해 봐야 '홍삼 청국장', '만둣국', '쟁반짜장'이 전부였다. 퇴근 후에는 논길을 걷고 주말에는 첩첩산중 봉우리를 하나씩 도장 깨기 하는, 자연친화주의자였다면 조금 덜 외로웠을까. 결국, 문명과 멀어진 사람들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기'라는 세계에 침잠한다. 그 방식은 다양했는데, 내 것을 뽐내 볼까 한다.
'시고르 월드'로 발령받으니, 주변사람들은 '직장일 말고는 할 일이 더럽게 없는 곳'에 가게 된 나를 불쌍히 여겨 몇 가지 팁을 주었다. 요즘 시골에는 각종 혜택이 많다. 군민 체육관,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공립 도서관을 적극 활용할 것. 옥수수 전, 다슬기 국수는 한 번쯤 먹어봐야지.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뭐시기 절, 타조 농장, 무궁화 공원에 아이들 데리고 가면 좋아할 수도. 사실 이거 다 필요 없고 좋은 공기 마시고 푹 쉬다와.
청정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새벽수영을 끊었다. 이번 기회에 물 공포증을 극복해 보리라 굳게 다짐하며,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물장구치고 몇 번 다이빙을 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언가 배운다는 뿌듯함에 취해, 차로 왕복 1시간 거리를 기꺼이 오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영장에서 코로나 옮으면 어쩌냐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과 이런저런 핑계까지 더해져 수영강습은 시들해지고 말았다.
'역시 운동은 생활 속에서 해야 해.' 이렇게 외치며 시작된 퇴근길 파워워킹. 논길, 강둑길, 마을길을 닥치는 대로 걸었다. 반짝이는 윤슬,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자랑하는 온갖 풀들, 그 사이에 가끔 예쁘게 고개 들고 있는 들꽃, 눈코입으로 사정없이 달려드는 것도 모자라 수혈까지 강요하는 벌레들, 언제 봐도 반갑지 않은 뱀까지 그 길에서 반겨주었다. 어설프게 전원주택 단지 개발이 이뤄지다가 기약 없이 중단된 마을길은, 건조한 날이면 사정없이 모래 먼지를 뱉어냈다. 이게 감자인지 고구마인지, 저게 엄나무인지 두릅인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감흥이 일지 않고 학습성과도 없었다. 잔업과 야근을 핑계로 파워워킹 모임에서 슬쩍 발을 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혼자이고 싶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내게 취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참에 취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가장 만만한 게, 그림이었다. 학원 한 번 다녀본 적 없었지만, 어릴 때는 무언가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시골에 살아도 남부럽지 않게 택배상자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밀키트 인기만큼은 아니겠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이던 '유화 그리기 키트'를 주문했다.
유명 화가의 대표작, 어디선가 한 번쯤 봤던 그림을 대 놓고 복제하는 '색칠공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다소 앞뒤 안 맞는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첫 그림은 '해바라기'로 선택했다. 씨앗을 빼곡히 박은 커다란 얼굴에, 이글거리는 황금 이파리를 역시 욕심껏 두른, 해바라기를 집에 걸어두면 재물복이 붙는단다. 실용성 만점인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커다란 독서대도 장만했다. 이젤을 사느니 독서대를 사서 책도 읽고 캔버스도 올려놓으면 일석이조일 터.
여러 편의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시력을 조금 반납했다. 노안인지, '예술 안'인지 알 수 없지만 눈이 안 좋아질 정도로 그림에 열정을 쏟았다는 게 멋지지 않은가. 처음에는 작은 칸에 적힌 번호대로 물감을 채우기 바빴는데, 점차 물감을 두툼히 쌓아 올려 그림을 완성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같은 자세로 몇 시간씩이고 색칠공부를 했다. 네 식구가 함께 걸었던 '브루클린 다리', 가고 싶었던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다리'와 그리스 '산토리니', 식탁 옆에 걸어 둘 커피잔 일러스트가 하나씩 완성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독서대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일어났는데 오른쪽 무릎 아래쪽이 저리고 만져도 내 살 같지 않았다. 지병이었던 디스크가 도졌던 것. 그 후로 몇 주간 걸을 때마다 오른쪽 다리가 저릿했다. 의사는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고,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증상이 좋아지고 나면 허리에 무리가 되지 않는 운동, 특히 내가 하다 만 수영을 꾸준히 해 보라고 한다. 그렇게 그림이 홈트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플랭크', '코어운동', '허리강화' 등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Bosu 볼 운동 영상. 내 귀에 쏙쏙 박히는 친절한 설명, 25분 만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엔도르핀이 솟는 그 영상에 반해서 2주 내내 매일 같이 그 영상을 따라 했다. 그렇게 혼자 하는 운동에 빠져 요가매트, Bosu 볼, 요가링, 필라테스링, 폼롤러, 아령 등을 두루 구비하고 그 유튜버의 영상을 하나씩 섭렵했다. 그렇게 디스크와 사이좋게 지내는 건장한 아줌마로 무럭무럭 자랐다.
30대 후반, 이른 퇴직 후 찾아온 외로움은 '내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손'을 되돌려 주었다. 외로운 시간이 내 일부를 일깨웠다. 그렇게 뜻밖에도, 외로움은 때때로 고맙고 쓸모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