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냉장고는 열 살이다. 아이의 돌 선물로 받은 양문형 냉장고이니 내 아이보다 한 살이 어리다. 하얀 몸체에 실버손잡이가 있는 냉장고. 길쭉하고 좁은 냉동실과 약간 더 넓은 냉장실로 이루어진 모양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냉장고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준다는 소문난 냉장고여서 그랬는지, 매번 고집하던 브랜드를 탈피해서 그랬는지, 별것 아닌 새로움이 나를 설레게 했다. 냄새 안 나게 깨끗하게 잘 써주겠다고 다짐하며 하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정리와 미니멀리즘에 한참 심취해 있을 때라 그랬나 보다. 어느 날부턴가 냉장고 컨텐츠 영상이 참 많이도 눈에 들어왔다. 똑소리 나게 살림을 하는 방송인 한 분이, 소주로 냉장고 청소하는 걸 보고는 냅따 스프레이통 하나에 먹다 남은 소주를 담았다. 어쩌다 김칫국물이 흘러넘치기라도 하면 소주를 칙칙 뿌려가며 뽀드득하게 닦아냈다. 그 소주에서 나던 알콜 향이 좋았다. 가끔 청소하다 말고 내 혀에 칙하고 뿌려대는 상상을 했다.
'김 빠진 소주도 혀에 대고 뿌리면 취하는 걸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냉장고 선반을 닦곤 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 그런지, 15년 정도가 수명이라는 냉장고는 오늘도 거뜬하게 잘 돌아간다. 몇 년 전, 이삿짐센터의 주방 담당 이모님은 냉장고 관리를 잘했다며 청소도 안 해주고 떠나셨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소주가 한몫을 했나, 신기하게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냄새만 안 나면 다가 아니지, 나는 누구인가. 미니멀리스트다. 공간을 숨 쉬게 하는 여자. 나는 그 숨 쉬게 하는 공간에 냉장고를 포함시켰다.
숨 쉬는 냉장고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 참고로 우리 집엔 팬트리가 없다. 전쟁이라도 나면 큰일이겠지만, 공간을 물건으로 채우지 않는 나는 라면이나 약간의 쿠키, 파스타, 국수류를 제외하곤 먹을 것을 쟁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냉장고에 다 들어가 있다.
냉장실은 5칸의 선반과 맨 아래 두 개의 서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자들의 마음을 잘 간파한 날개 부분이 있다.
높아서 손이 닿지 않는 맨 위칸엔 두유가 두 줄로 서있다. 비상식량이라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므로 각 잡고 몇 달이든 서있게 했다.
두 번째 칸엔 요거트와 바로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소분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딴생각 안 하고 바로 먹을 수 있게 했다.
세 번째 칸엔 각종 샐러드야채와 토마토, 양파를 넣어둔 받드가 있다. 벽에 찰싹 달라붙게 해 싱싱함을 유지하도록 신경 써서 배치했다.
네 번째 칸엔 사과즙과 양파즙, 배도라지즙이 일렬로 줄 서있다.
맨 아래 다섯 번째 칸에는 김치와 멸치류의 반찬이 깊숙이 들어가 있다.
날개 부분엔 각종 소스가 가지런히 거꾸로 서있다.
반찬을 잘 차리지 않는 나는 반찬을 제일 아래 칸에 배치하여 냄새가 못 올라오게 만들었다. 나머지 각종 장류나 부피가 큰 야채류, 감자, 고구마, 계란은 맨 아래 서랍에 숨겨 두었다. 이리하여 냉장고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유제품과 과일 이외에는 딱히 먹을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왼편 냉동실을 열어보면
날개 부분엔 쫑쫑썰린 각종 야채가 얼음이 된 채 서있다.
제일 잘 보이는 중간엔 얼린 밥과 김, 냉동볶음밥과 빵, 피자, 만두 등이 있다.
먹으면 바로 살이 찔 것 같은 아이스크림과 간식류는 나만 아는 저 뒤편에 숨어있다.
우리 집 사람들은 뭐 먹을 것이 없나 냉장고 안을 둘러보다가도 이내 문을 닫아 버린다.
식자재 배치의 핵심은 냉장고 안이 텅 비어있게 연출하는 것, 먹을 것이 없어 보이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심지어 한 칸을 비워두기도 한다. 냉장고 안에 모든 재료가 있지만 언뜻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휑한 곳, 요리를 하기 전에는 무슨 음식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곳, 그곳이 나의 냉장고다.
안 그래도 듬성듬성한 냉장고를 일주일에 한 번은 냉파를 한다며 구석구석에 있는 재료를 다 꺼낸다.
"엄마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요즘따라 부쩍 살이 찐 내 아이가 매일 하는 질문이다.
"아직 몰라, 이따가 냉파 해보고 알려줄게"
이건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다.
나만 아는 재료를 이용해 주로 만드는 음식은 일품요리가 대부분이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서 그럴듯한 한 끼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이 한 끼는 미니멀한 냉장고에서 나온다. 있는 재료 이외에는 더 사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짜낸다. 김치나 김, 멸치를 곁들인 최소한의 반찬류를 곁들여낸다. 심플한 음식이 나와 내 아이의 몸을 미니멀하게 만들어 주길 기대하는 소소한 밥상이 차려진다.
일주일의 살림을 하면 냉동실은 반 정도가 비워지고 냉장실은 80퍼센트 이상이 비워진다. 싹 다 비워보고 싶지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거다. 슬슬 냉장고가 비어 가면 내 마음은 설레이고 장보기 리스트는 가득 차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미니멀 병이다. 냉장고를 비워가며 흐뭇해하는 나. 옷은 안 사도 먹을 것은 사야 하니 드디어 쇼핑이라는 걸 하게 되는 유일한 시간이 다가온다.
냉장고, 전원이 들어와 숨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쉴 수 없는 물건.
냉장고에게 가혹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가전은 쉴 수 있지만 냉장고는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쉬지 못하는 냉장고를 숨 쉬게 하고 싶다.
쉬지 못하는 것이 냉장고의 운명이라면
상큼한 알콜냄새라도 맡게 해 주어 문을 여닫을 때마다 웃어주고 싶다.
그 시작은 꽉 채우지 않는 것이고 빨리 비워주는 것이다.
그나저나 냉장고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손잡이 부분이 해지고 있다.
이곳을 어찌 리폼해 볼까 고민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