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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이 갑갑함

정수기 문맹 탈출기

by 나탈리


성(兄을 정답게 이르는 말), 나 오늘 한 건 했다네. 한 번 들어보려오? 오늘은 문명의 충돌이 강하게 이 아우를 강타한 날이었다네. 바로 정수기 때문이었어. 며칠 전 우리 세탁실에도 드디어 정수기가 설치되었거든? 십 년 장기근속한 선배 샘이 원장님께 간구하여 얻어낸 쾌거였지.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정수기라 과분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추운 겨울 식당으로 물 뜨러 다니는 것도 되게 귀찮던 터라, 얼씨구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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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야, 성!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없잖아. 얼마 전까지 보리차를 애용하다가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생수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페트병이 너무 많이 나와 날마다 분리 수거하는 것도 일이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정수기를 들여놓을까 말까 고려하던 차에 오늘의 사건이 터졌지 뭐야.

한참 분주하게 일하던 중, 갈증이 나더라고. 냉수 약간에 온수를 받아 들었는데, 컵을 떼면 자연 멈춰야 될

온수가 그치지 않는 거야. 좀 전까지 아무런 이상 없던 정수기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어.

뒤로 젖혀진 컵 밀림 방지대가 당겨도 당겨지지도 않고 뜨거운 물은 계속 나오는 거야. 황급히 대야를 가져와한손으로 받쳐든 채, 휴가 중인 선배 샘에게 전화를 했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물바다가 될 판이니 샘이 어디든 연락 좀 해 달라 부탁했지. 시설팀 담당자분은 휴가라기에, 데이케어 센터의 과장님께 부탁해 보면 어떨까요, 물었지. 그분은 이곳 요양센터 소속이 아니니 이제

그런 부탁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는 선배! 그럼 어떡해요? 우는 소리를 하니, 우선 수도꼭지와 연결된 밸브를

잠가 보라 조언하더군. 잠가도 물은 계속 흘러내렸어. 급기야 정수기 밑으로 물이 고이더니, 탁자 아래쪽의

세제포대 사이사이를 틈타고 흘러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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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입사한 지 삼일 만에 겪었던 물난리가 떠오르더군. 말도 마. 세탁기 고장으로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했던 작년 여름의 혹독한 신고식! 두 번은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어. 세탁실 면적의 반 정도가 물에 잠겼으니까. 고인 물을 어찌 퍼 낼까 고민하다 쓰레받기를 써도 보고, 마른걸레로 물을 적셔 짜내도 보고, 락스를

덜어낼 때 사용하던 사이펀 펌프(제일 소용없었음)도 써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손발이 죄다 고생스러웠었어. 다행히 몸살은 나지 않데. 근육이 좀 당기고 쑤시긴 하였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에 도리질을 치며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반가운 해결사가 왔어. 급하니까 선배 샘이 과장님을 부른 거야. 데이케어센터장으로 영전되어 가신 귀하신 과장님이 납시자마자 상황은 바로 종료되었어.

연속 출수 레버가 홱! 돌아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이 '갑갑이'가 그 난리굿을 벌인 거야. 어이없어하는 과장님의 표정! 쥐구멍을 찾았지만 있을 턱이 있나. 수도 연결 밸브를 원래대로 돌리고 테스트까지 부탁드렸지.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 그 무슨 조화로 연속 레버 그것이 돌아가 있었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어.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나도 모르게 돌렸던 걸까? CCTV라도 돌려 보고 싶은 심정이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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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이 덜렁이는 당황하면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당황이 죄네.

당황에는 약도 없나 봐. 성도 누누이 말했잖아. 넌 참 갑갑한 데가 많다고. 공부머리는 따로 있는가 보다고.

인정! 성도 인정한 ‘갑갑이’가 당황해 버리면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가 봐. 참, 아무리 집에 정수기가

없기로, 정수가 한두 번 써 보냐고. 식당이나 카페 같은 데서 곧잘 사용하던 정수기를 오늘 처음 본 것처럼

헤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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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오늘 난, 콜라병을 처음 접한 부시맨이 된 기분이었네. 것도 콜라병으로 한 대 얻어맞은 부시맨 말이지. 중 3의 어느 월말고사 마지막 날, 전교생이 줄지어 신나게 향했던 영화관에서 부시맨을 처음 만났었지.

성도 생각나? 시험 끝나고 누리는 문화생활의 달콤함, 해방감이 어떠했는지? 그 당시 영화관람료가 300원이었는데, 엄마한테 단체관람이라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관람료를 타 가지고선 영화 대신 군것질한 적도 몇 번 있었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신선한 충격과 웃음을 주었던 그 부시맨이 정수기를 처음 접하면, 나 같은 해프닝을 벌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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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리를 해야 했네. 신문지다발, 마른걸레를 왕창 갖다 놓고 물기부터 제거했어. 탁자 밑을 오리걸음으로

다가가 10킬로 육박하는 세제 봉투들을 옮겨내고 물기를 닦아 정리하느라 혼이 반쯤 나가버렸네. 그래도

예전보다 소규모였으니 다행이지만, 나의 갑갑함이 유독 돋보이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해, 성? 세월이

가도 변지 않는 이 갑갑함을 어찌해야 할까? 아찔하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래도 현명한 이들의

지혜를 빌려 가며 이때껏 잘 살아왔네 그려. 지혜와 꾀를 겸비한 사람들이 성 말고 주위에 간간이 있더라고. 참 다행이지? 이 참에 별명 하나 지어야 할까 봐. 이차분 혹은 이 침착으로. 어때? 좋은 생각이지?


아 참, 고백할 게 하나 더 남았네, 성! 놀라지 마? 기사님이 정수기를 설치하고 나서 물을 몇 바가지 받아서

버리라 하기에, 일단 냉수를 충분히 받아내서 버렸어. 그리고는 무심코 온수를 받다가 그만 물병을 쭈글탱이로 만들어버렸지 뭔가. 낭패도 그런 낭패가 있을까. 바로 동료 샘한테 이실직고했어. 새로 하나 사 올게요, 했더니 이제 물 뜨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 그럴 필요 없다고, 쿨하게 사고뭉치 후임을 안심시켜 주시데. 이제 정수기의 '정'자만 들어도, 정수기 앞에 가 물을 마시려고만 하여도 '그때 그 사건'이 수시로 떠오르니, 그냥 웃고 말지. 웃지 않으면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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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성! 끝내 물난리 사건이 높으신 분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가설랑, 원장님하고 사무국장님이 시찰

오셔서 사건의 경과를 문의하셨다네. 음미 창피한 것! 살다 살다 이런 일도 다 있네 그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의 갑갑함을 쉬쉬하지 않고 차라리 시원스레 고백함으로 만인에게 웃음이나 선사하려네. 혹, 성이 사는

지구 반대편에는 지우고 싶은 기억만을 골라 삭제해 줄 만한 처방 같은 거, 뭐 없을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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