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남편은 주말 내내 집에 붙어 있었다. 집안을 오가다 책상에 앉았다 침대에 누웠다가.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운동도 가지 않았다. 출장에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지방까지 다녀왔으니 뻗을 만도 했다. 나로서는, 졸지에 삼식이가 됐으니 뭘 먹여야 하나 귀찮기도 했지만,
실은 불안했다. 피로 이상의 더 큰 문제가 있어서였다. 한동안 안심하고 있었는데 진행중일까, 드디어 올 게 왔나, 가슴이 철렁. 내 건강도 별로인데, 남편까지? 남편은 나보다 더 치명적이다. 간병을 해줄 사람도 없고 간병인을 오래 쓸 만큼 돈을 쌓아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런 상태로 연명하고 싶지는 않은데. 우리에게 평온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로병사'의 '로병'이 한번에 밀려오니 감당하기 버겁다.(그래도 '사'는 아직이니 감사한가^^ )
늦은 밤이었다. 남편이 도쿄의 지인에게 이메일을 받았단다. 남편과 비슷한 병증으로 고생하던 분인데, 용한 의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의사는 알고보니 그분의 동창생. 고향인 지방에 개업을 한 통에 잊고 있었다고. 결국 그 친구의사 덕에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면서 남편에게 추천을 했단다. 거리도 멀고, 비용은 얼마나 될지 보험도 안 되니 각오해야겠지만 희소식이었다. 먼저 지금 다니고 있는 서울 병원에서 선생님 의견을 듣고, 그 용한 의사가 있는 일본의 지방에도 가보자고 의논을 했다.
만약에..... 생각해 봤다.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면 1년쯤은 그곳에서 살아야할까. 경과도 계속 지켜봐야 할 테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같이 가서 밥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일종의 예방접종이다. 이 나이에 다시 해외생활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굳이 나쁠 것도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다. 사람 사는 데란 다 비슷비슷하고 중국도 인도도 아니고 겨우 일본인데 뭐. 돈이 문제긴 하겠지만, 좋아질 수 있다면 뭔들 못 하리. 돈으로 건강한 시간을 산다면 기꺼이 해야지. 그동안 남편은 직장에 열심히 다녔으니 안식년이라 치고 나는 그 덕에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 한적한 소도시에는 살아본 적 없으니 더 늦기 전에 한번쯤 사는 것도 괜찮겠다. 누군가는 이를 로망으로도 삼지 않는가. 이 역시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 내 인생도 참, 버라이어티하다.ㅋㅋ
그 명의 소식 덕에 기댈 구석이 생겼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마음 먹기 나름이라더니. '희망'이란 이래서 중요하구나, 새삼 느낀다. 종종 '긍정의 배신'이란 말도 하고, 이런 제목을 이름으로 단 책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좋은 게 맞다. 일단 숨 쉴 구멍을 터주니까. ('희망 고문'이라는 더 비참한 말도 있지만, 이 말도 상황도 너무 싫으니까 무시한다.)
판도라 상자의 바닥이 아니라 해도, 살아가면서 그 희망이라는 착한 애를 일찌감치, 또 자주 꺼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나뿐 아니라 내 친구도 내 옆집도, 모두 다 그럴 것이다. 원래 그러면서 사는 것이 사람이다. 나의 이 희망이 배신의 아이콘이 되지 말고 '희망'으로 고스란히 살아남아주기를, 그러다가 약간의 시간을 거쳐 결국에는 평탄한 일상생활과 감사로 이어지기를.^^ 쌀쌀한 가을날, 훈훈한 봄의 마음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