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모른다. 자신이 어디가 아파서 유치원을 못 가는지, 왜 집이 아닌 병원에서 약 먹고 아픈 주사를 맞는지 모른다. 그저 낯선 환경에서 두리번거리며 탐색 중이다. 머리카락이 없는 환아들을 보며 궁금해한다.
아이가 다리 아프다며 주저앉고 안아달라고 할 때 코로나19로 야외 활동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다리 힘을 길러야 하니까 안아줄 수 없다고 했다. 입술 색깔이 창백해지고 피부색이 노랗게 되었을 때 귤을 많이 먹어 그런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적혈구 수치가 바닥을 치며 어지러움으로 힘들어하는 건 줄 모르고.
워킹맘으로 승진과 인사이동으로 바쁜 시기라 야근을 일삼고,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사람이 지역사회 주민들의 안녕은 살폈으나 내 가족의 안녕은 살피지 못했다. 엄마인 내가 더 똑똑하지 못해서 아이의 아픈 신호를 놓쳤다.
죄책감에 끝없이 눈물이 나온다. 가만히 있어도 흐른다. 밥을 먹어도, 창밖을 보아도, 아이를 보아도 눈물이 흐른다. 옆 침대 가족들이 들을까 울음소리를 삼키며 울기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속 흘러넘치는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다. 가슴이 타들어가며 목구멍이 찢어진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부를 수 있는 신은 다 불러 물어본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답은 없다. 그게 현실이다. 핸드폰 사진첩에 있는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지금 옆에 있는 아이는 환자복을 입고 손과 발에 정맥 주사 줄을 연결하고 누워있다. 며칠 전만 해도 출근해서 일했는데 지금은 낯선 도시의 병원에 있다.
얼굴은 퉁퉁 붓고 눈은 빨갛게 며칠을 지냈다. 그 사이 아이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고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안 되는 여러 명의 의료진들이 다녀간다. 전신마취를 한 아이를 몇 번이나 수술방으로 보내도 봤다. 정신없이 몰아친다. 무슨 치료제인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앞으로 주의해야 할 환경과 금지해야 할 음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내몰렸다.
지금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화를 낸다고 아픈 아이가 낫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의료사고로 아이를 내 눈앞에서 잃어버릴 뻔했는데 이젠 살려야겠다. 그게 지금 집중해야 할 현실이다. 아이가 아프고 난 아픈 아이를 둔 엄마다. 그게 지금 마주한 현재다. 지금 발 디디고 있는 이 병원에서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아이를 위해 찰나의 순간인 현재를 알아차려 집중하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이를 살리자.
스탠리는 자신 앞에 놓인 불가능한 일 대신 당장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만 생각했다.(구덩이. 루이스쌔커. 창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