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웃음소리 Jun 02. 2023

제주에서 펜션청소 알바 해보셨나요?_[4]

"1월 20일에 펜션 청소 해 주실 수 있으세요?"

" 네, 저희가 하는 일인데요. 당연히 해야죠."



사장님 깨톡이 왔다.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보통은 "1월 20일 청소 있습니다."라고 하시는데.


펜션의 실소유주인 사장님의 부모님께서 펜션에 며칠 묵으시다가 우리에게 청소를 요청하신 거였다. 잠시 얼굴을 보자고 하셨단다.


왜 보자고 하시는 거지. 살짝 부담스러운데. 남편과 펜션으로 갔다. 펜션에 도착했다. 번호키를 누르는 대신 노크를 했다. (펜션에 벨이 없다) 인자함과 날카로움을 갖추신, 그러니까 웃으시는데 안 웃으시는 긴 머리 멋쟁이 어르신이 반기신다. 아, 반기시는데 안 반기신다.


환하게 인사를 드렸다. 인자한데 날카로우신 분들을 마주하며, 내 표정도 환한데 안 환했을지 모르겠다. 남편과 나를 빤히 번갈아 보신다. 강렬하게 아이컨택을 하며 청소를 잘해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나도 눈을 바라보며 감사하다고 한다. 아직 퇴실할 준비가 안 되었다며 신경 쓰지 말고 청소를 하라고 하신다. 지켜보시는데 청소를 하라굽쇼. 아무렇지 않은 척 청소를 시작한다. 침대시트 교체부터 시작했다. 뒤통수가 아주 뜨겁다.


잠시 후 어르신 두 분이 밖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돌아오겠다 하신다. 그러면 퇴실은 언제 하시는 걸까요. 그런데 갑자기 오만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신다. 설날이라고 우리 아들한테 주는 세뱃돈이라고 하셨다. 기분이 이상했다. 감사한데 안 감사한 기분. 이상하게도 오만 원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 청소하고 사장님께 받는 돈이면 충분하다며 사양을 했다. 그러자 어르신은 본인이 우리 아들의 할머니나 다름없다고 하시며 기어이 내 손에 오만 원을 쥐어 주셨다. 더 사양하면 안 될 것 같아 감사히 받겠다고 인사드렸다. 


어르신 두분이 카페에 가신 후 남편과 나는 평소처럼 청소를 했다. 주방은 아직 쓰시는 것 같아서 밖에 나와있는 두어 개의 컵과 그릇을 일부러 치우지 않은 상태였다.


사장님의 부모님께서 돌아오셨다.






청소상태를  체크하신다. 처음 뵈었을 때 보다 날카로움이 약 28% 정도 올라간 느낌이다. 어르신들은 그대로인데 내 긴장도가 28% 올라가서 그렇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밖에 나와있는 모든 컵과 그릇을 보이지 않게 수납하라고 하신다. 그러고는 스텐 냄비의 탄 자국을 제거하는 특수 수세미를 사 오셨단다. 서랍을 열어 보여주시는데, 한가득 사 오셨다. 특수 수세미로 냄비를 닦으라고 하신다. 펜션에는 냄비가 많다.


수저를 이 사람 저 사람 다 써서 쓰려니 찝찝하다며 뜨거운 물에 보글보글 삶고 행주도 뽀얗게 삶아서 빨아 두라고 하신다. 개인 별장 겸 펜션인 이곳. 사장님의 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이곳. 나는 가정부와 펜션메이드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다음은 창문차례. 창틀과 창문을 닦으라고 하신다. 펜션에는 커다란 창이 많다. 모든 방과 거실에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커다란 유리(한쪽 벽면을 꽉 채운)이 있고, 창문도 시원시원하게 크다.


사장님의 부모님이 퇴실하셨다. 남편과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창문을 닦으라니. 과연 우리가 합당히 해야 하는 일인 건가. 이 크고 많은 문과 창문을 어떻게 다 닦냐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덤앤더머는 사뭇 진지하게 결론을 내렸다.  


분명 결론을 내렸는데 덤앤더머는 곧장 결론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매우 신속한 언행불일치다. 창틀부터 닦았다. 창틀이 깨끗해진다. 일층과 이층의 모든 창틀을 닦았다. 선배님이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창틀은 미리 닦아둘 걸 그랬다. 이렇게 깨끗한데.


걸레를 빨았다. 이번에는 유리창을 박박 닦아본다. 안쪽만 닦으니 바깥의 얼룩 때문인지 창문이 그대로다. 바깥쪽도 닦아본다.  닦으면서도 이건 아닌데 싶다. 사장님과 몇 번 뵙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이래저래 친분이 쌓이다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냉정해지기가 쉽지 않다.  하려면 두세 시간도 넘게 걸리겠는데. 한번 하면 쭉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럴 땐 아주 똑 부러지게 말하고 싶다.


펜션은 가리는 것 없는 완벽한 남향이다. 해가 아주 뜨겁다. 해를 마주 보며 유리를 닦다 보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제주에 와서 가뜩이나 기미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가 더 생기게 생겼다. 거실의 큰 유리문을 박박 문질러 닦고 방에 있는 문을 닦는다. 잠시 후 처음 닦은 거실의 유리문이 깨끗한지 다시 본다. 묵은 물때라 그런지 닦고 뒤돌아서니 얼룩이 완벽히 처음 그대로 올라온다. 차라리 잘됐다 싶다.


창문과 문의 유리를 닦는 일은 따로 장비를 갖추신 분들을 불러서 해야할 일이지 우리가 조그만 걸레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상상 속에서 똑 부러지게 말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청소해 보니 금세 얼룩이 올라와서 해도 똑같을 것 같다고 에둘러 말씀드렸다. 유리창 청소는 하지 않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됐다.






개인 별장과 펜션을 겸하는 이곳. 야심 차게 청소를 시작했는데, 체계가 없고 손님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는 배울 것이 딱히 없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 펜션 관리를 하는 사장님을 지켜보며 관광객의 시선으로 생각하곤 했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느낀 것이 많으니 배운 게 영 없지는 않다.) 용기가 없어 안 될 이유들만 떠올리며 제대로 된 도전을 해보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다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예감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투숙객이 아니라 사장님 가족을 위해 냄비를 박박 문지르고 수저를 소독하는 업무,  씩씩한 편인 나를 고단하게 만들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