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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Nov 18. 2022

 퇴직 후 첫날의 단상

 이제부터 뭘 하지?  

  

37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나왔다. 퇴직 후 첫날인 오늘도 평소처럼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한결 여유로운데 한편으로 허전한 느낌도 든다.      


 ‘이제부터 뭘 하지?’      


자연스레 TV 리모컨에 손이 갔다. 

8시 조금 넘은 시각 KBS 1 TV에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하고 있다. 발달장애 국악인 자매의 이야기다.  내가 퇴직 직전 근무한 채널은 ‘한민족방송’이지만 가장 오랜 기간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채널은 장애인을 위한 KBS 3 라디오 ‘사랑의 소리 방송’이다. 전체 KBS 라디오 채널 7개(1 라디오, 1FM, 2 라디오, 2FM, 3 라디오, 한민족방송, 국제방송)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인 17년을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장애인에 대한 프로그램이라면 지금도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아침 TV에서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보다 보니, 내가 오래전에 제작했던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발달장애인들의 천재성을 다룬 ‘장애를 가진 천재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2005년에 방송했는데, 장애를 갖고 있지만 음악, 미술, 운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당시 20살이었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야 양과 발달장애 수영 선수 김진호 군, 미술에서 재능을 발휘한 박혜신 양 등 젊은 천재들과 이들의 어머니를 인터뷰했었다. 지금쯤이면 30대 후반이 되어 있을 텐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최근 읽은 김 훈 작가의 <하얼빈>에 나온 내용도 생각이 나는 아침이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감옥으로 찾아온 빌렘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 이 복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2주에 한번 운항하는 배인데 배가 떠나기 직전 항구에 도착해 배를 타서 무사히 하얼빈에 도착할 수 있었던 점이 감사합니다. (중략) 10월 26일에 이토를 쏘았는데 처자식이 27일에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도착했다면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하루 차이에 감사합니다.      


나도 지난 37년여 직장 세월을 돌아보니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감사할 일이 많다. 평소 염두에 두지 않았던 직장인데 친구를 따라서 입사 시험을 보게 된 것에 감사한다. 그때 시험을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합격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남편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특히 감사한다.      


하지만 어찌 좋은 일만 있었으랴. 속상할 때도 많았고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때마다 가족들이 옆에서 든든히 받쳐 주었고 무엇보다 신앙을 함께하는 믿음의 동료들이 큰 힘이 되었다. 회사 한편에 틈틈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새 힘을 얻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믿음의 동료들이 없었다면 무사히 정년을 맞이하고 박수받으며 회사를 떠나는 기쁨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보니 감사의 마음이 충만하게 된다. 이금 이 순간, 숨 쉬고 밥 먹고 책 읽고 말하고 운동하고 잠자는 모든 일상에 감사할 뿐이다. 작지만 새로운 다짐도 해본다.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해보리라. 똑같은 날들의 반복이 아닌 매 순간 새로움으로 남은 인생 여정을 채워가 보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위로해주고 싶다.      


 ‘미영아! 그동안 애썼다. 열심히 살았어. 앞으로의 제2의 인생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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