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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Aug 03. 2023

아들을 죽인 왕, 영조의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사도세자를 죽인 세가지 힘! 

조선왕 중 가장 오래 임금 자리에 있었던 사람,

탕평과 애민 군주라는 명성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조선왕실 최대 비극.... 그는 왜 아들을 죽인 왕으로 남게 됐을까...




오늘 만나볼 조선왕은 제21대 왕 영조다83살까지 살아서 조선왕 27명 중 최장수이면서 재위 기간도 52년으로 가장 길다. 재위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던 것은 정통성 시비였다먼저 혈통의 정통성이다그는 숙종과 후궁 숙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생모 숙빈 최 씨는 여느 후궁과 달리 궁에서 가장 비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여기에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닌 다른 남자의 자식이라는 음모론까지 있었다     


그 다음은 배다른 형이자 선왕이던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경종을 퇴출시키려는 역모에 연루됐다는 등의 의혹이었다영조가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으니 이런 정통성 시비는 주로 소론과 남인 세력에 의해 제기됐다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소론 과격파와 남인은 영조 즉위 초반인 영조 4년에 전국적인 무장봉기를 시도했다이인좌박필현정희량 등이 주도한 무신년 거사는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치다가 진압됐다. 즉위한 지 30년도 더 지났지만 이런 정통성 시비는 종식되지 않고 있었다.


영조 31년에 전라도 나주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괘서가 나붙었다대대적인 국문이 벌어져 윤 지 등 60여 명이 처형됐고 소론은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영조는 나주괘서사건 마무리를 기념해 특별 과거 시험을 열었는데 심정연이라는 선비가 답 대신에 영조를 비방하는 내용을 써내서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국문 과정에서 신치운이라는 사람은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영조를 조롱했다영조가 세제 시절 병이 난 경종에게 상극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려 죽게 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왕의 면전에서 말한 것이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 덕분에 왕이 됐지만 노론의 임금이 아닌 모든 백성의 임금이 되고자 했다그래서 추구한 정책이 탕평책이다극단적인 성향의 인사들즉 준론을 배제하고 노론소론 온건파를 통해 국정을 이끌어가려고 했는데 이런 영조의 바람은 노론 강경파의 저항과 소론 강경파의 끊임없는 소요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영조가 노론의 수장 민진원소론의 수장 이광좌를 불러 두 사람 손을 맞잡게 하고 눈물로 화해를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이 자리에 영조는 형형색색의 식재료들로 구성된 탕평채를 내놓으며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이 시기 탕평책은 영의정을 노론이 맡으면 좌의정을 소론이 맡고판서를 소론이 하면 참판은 노론이 하는 식의 쌍거호대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노, 소론 간 유기적 화합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즉위한 지 17년 만에 경종 때 노론이 연루된 역모 사건을 모두 무혐의로 돌려놓으면서 영조는 확실하게 노론 편에 서게 된다이 역모에 세제 시절 영조 자신도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노론과 입장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저항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며 영조를 괴롭혔다.     


영조는 정실 왕비 정성왕후에게서는 평생 자식을 낳지 못했다대신 왕자 시절이던 26살에 후궁 정빈 이 씨에게서 첫아들을 봤다이 아들은 영조가 임금이 된 후 세자로 책봉됐으니 효장세자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10살에 사망하고 왕실에는 한동안 왕위를 이를 아들이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른 후궁 영빈 이 씨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사도세자다이때 영조의 나이 42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얼마나 좋았던지 아기가 태어난 그날 바로 원자로 삼았고 돌이 막 지난 갓난아기를 세자로 책봉했다이렇게 사도세자는 조선의 최연소 원자최연소 세자였다. 


영조는 돌이 갓 지난 아기를 상대로 왕세자 교육을 시작했다좋은 스승을 뽑고 자신도 교재를 직접 쓰며 열성을 다했다. 어린 세자는 총명했고 글씨도 잘 써서 신하들이 글씨를 서로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조기교육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세자는 10살 무렵부터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말 타고 창 휘두르는 무예에 더 관심을 썼다아버지는 그럴수록 세자를 채찍질했다공부한 내용을 물어보고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엄하게 꾸짖었다세자는 갈수록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엇나갔다. 누구보다 학문도 깊으며 완벽주의자인 영조가 보기에  공부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쏟는 아들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것 같다.


“공부가 깊지 못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리기 십상인데...
장차 저 노회 한 신하들을 어떻게 다스려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꼬...”


이런 심정 아니었을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더욱 악화됐다사도세자는 15살부터 영조의 명에 의해 아버지 대신 국정을 맡아 처리했다하지만 일 처리가 미숙하다고 영조에게 질책을 당하는 일이 잦아졌다성격적으로 다혈질에 집착이 심하고 변덕스러웠던 영조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도 세자를 망신 줬다.     


그럴수록 세자는 더욱 주눅이 들며 일탈하기 시작했다몇 달간 아버지를 찾아뵙지 않는가 하면 아버지 몰래 궁을 빠져나가 수십일 씩 지방을 유람 다니기도 했다마침내 세자는 궁녀와 아랫사람들을 해치는 광증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렇게 살얼음판 같은 부자 관계를 이어오던 어느 날 노론 측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바치자 영조는 얼마 후 창경궁 문정전 뜰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들어가게 했다.     


파탄난 부자 관계 외에 사도세자의 죽음 뒤에 있는 또 다른 요인은 당시의 당쟁 구도였다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경종을 모시던 궁녀와 내시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소론에 우호적인 입장을 갖게 됐다. 또한 세자가 대리청정 중 친 소론적 행보를 보임으로써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반감을 샀다는 분석도 있다이렇게 조정 내 반(反) 세자 정서가 강한 가운데 영조가 66살에 새로 들인 15살 중전 정순왕후 김 씨의 경주 김 씨 세력도 여기에 가세했다. 왕실 내부 분위기도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영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숙의 문 씨와 친누이인 화완옹주도 사도세자 반대 세력이었다장인 홍봉한 역시 마지막 순간에 사도세자 제거 대열에 합류하면서 사도세자는 국왕부터 왕실 친인척대신들까지 거의 모두에게 고립됐다아버지이자 임금이 아들을 포기하다시피 한 지경까지 갔으니 누가 허물 많은 세자를 보호하려고 나설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자식을 죽이고 살리는 최후의 권한을 지닌 이는 아버지 영조! 그는 왜 세자를 버렸을까영조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단언할 순 없지만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존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대안이 없을 때는 어떻게든 세자와 함께 갈 수밖에 없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던 때에는 이미 혼례까지 치른 11살의 영특한 세손이 있었다그리고 결과론이기는 하지만군왕으로서 세손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 영조의 판단은 옳았다.   


260년 전 삼복더위에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 임금이 그날의 비극을 뒤로한 채 구리시 동구릉 내 원릉에 잠들어 있다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업적보다 먼저 사도세자의 뒤주를 떠올리는 걸 보면 영조의 예언이 맞은 것 같다사도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두 사람이 부디 저 세상에서는 왕과 세자가 아니라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로 만나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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