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치세, 선조는 조선에 무엇을 남겼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임금 ‘선조’다. 조선의 제13대 왕이었던 명종과 인순왕후 심 씨 사이에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3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조선 건국 이래 명종까지는 왕의 직계 혈통을 따라 왕위가 계승됐지만 왕실의 유일한 직계 자손인 순회세자가 죽으면서 다음 왕부터는 새로운 혈통, 즉 방계 혈통이 왕위를 잇게 된다. 선조가 바로 방계 혈통으로 임금이 된 첫 사례다.
선조의 할아버지 격인 제11대 왕 중종은 후궁 9명을 뒀는데 그중 창빈 안 씨에게서 덕흥군을 낳았다. 덕흥군은 아들 셋을 뒀는데 그중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후사 없이 죽은 명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됐으니 제14왕 선조다. 선조의 방계 콤플렉스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렇다면 하성군은 어떻게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낙점받을 수 있었을까?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하루는 명종이 덕흥군의 세 아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을 한번 써보라고 했는데 두 형들은 아무 생각 없이 썼지만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어찌 감히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양했다. 명종이 또 묻기를 "임금과 아비 중 누가 중하냐?"고 하자 “임금과 아비는 비록 같지 않사오나 충효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라고 지혜롭게 답해서 명종과 인순왕후 눈에 들었다고 한다.
이후 후계 문제를 명확히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명종이 중병이 들어 의사 표현도 못하고 있는데 인순왕후가 임금의 뜻이라며 하성군을 후계자로 발표했다. 명종의 뜻이 진짜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명종은 그날 밤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선조가 즉위했다.
16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인순왕후는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만 수렴청정을 하고 임금에게 권력을 넘겼다. 선조는 명종 대의 외척 정치를 척결하고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재야의 선비 집단인 사림은 대대로 ‘사화’라고 불리는 박해를 받아오다 선조 대에 이르러 조정을 장악해 권력의 주류 세력이 된다. 이때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면서 조선의 정치적 특징 중 하나인 붕당정치의 시대가 시작된다. 성리학의 이념적 성향과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얽힌 붕당 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죽기 살기 식의 권력투쟁으로 비화되는데 그 단초가 드러난 게 임진왜란 발발 2년 6개월 전 일어난 정여립 모반 사건이었다.
동인 소속 정여립이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모반을 꾸몄다는 이 사건으로 약 3년에 걸쳐 주로 동인계 연루자 천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동인이 큰 타격을 받고 서인이 조정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붕당 간 혈투는 이후 200여 년간 지속되면서 조정에 숱한 피를 뿌렸다.
붕당의 대립은 정세 판단에도 혼선을 일으켰다. 정여립 사건 처리가 진행 중일 때 선조는 일본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인인 황윤길은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했고 1년여 만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왜군을 만나게 된다.
선조는 왜군이 조선군을 격파하며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자 서둘러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개성, 평양을 거쳐 더 북쪽 의주까지 올라갔다.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왕이 왜군에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도망쳐 훗날을 도모하는 게 현실적인 대응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백성이 도륙당하고 국토가 초토화된 가장 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제 살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이순신 장군과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전쟁의 물줄기를 바꿨다. 여기에 명나라 원군이 더해짐으로써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국민에 대한 선조의 평가는 냉혹하기만 했다.
“이번에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병들은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은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이런 인식의 결과로 전공을 세운 선무공신에는 18명이 책봉된 반면에 왕의 피란길을 수행한 호성공신은 내시들까지 대거 포함시켜 86명이나 된다. 조선 수군을 위험에 빠뜨린 원 균이 이순신, 권 율과 동급으로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됐는가 하면 곽재우, 김천일 등 의병 장수들은 모조리 제외됐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신하들의 요청으로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다른 후궁 소생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전쟁 통에 나이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세울 수는 없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시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를 이끌도록 했다. 선조가 피란길을 재촉하는 동안, 18살의 광해군은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등지를 돌며 조선 왕조가 살아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의병을 규합하는 등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도망가기에 바쁜 자신의 초라한 행보와는 크게 비교되는 이런 활약에 선조는 광해군을 더욱 경계하고 시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이 끝나고 왕비가 죽자 51살의 선조는 19살 중전을 새로 맞아들였다. 인목왕후다. 그녀는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가 정실부인, 즉 왕비에게서 얻은 첫아들, 적자였다. 조선의 첫 방계 혈통 왕이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에게 뒤늦게 얻은 적통 아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영창대군이 태어날 때 광해군의 나이는 31살, 하지만 갓 태어난 적자에게 장성한 서자 왕세자의 위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세자 교체 희망을 읽은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나섰고,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를 둘러싼 팽팽한 긴장도 사라졌다. 그의 나이 57살. 조선왕 중 네 번째로 긴 41년간 임금 자리에 있었다.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이렇게 선조는 나라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참화를, 왕실에는 불행의 씨앗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목릉에 묻혀 있다.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가 그의 곁에 함께 잠들어 있다.
의인왕후는 전국의 이름난 기도처에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끝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후궁 소생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아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대비 호칭도 박탈당한 채 서궁에 유폐돼 지내다가 인조반정으로 복권돼 48살까지 살았다.
방계혈통으로 말을 잘해서 왕이 된 남자! 과연 그날의 선택은 옳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