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중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
경기도 구리 동구릉은 왕릉 아홉 기가 조성돼 있는 조선 최대 왕릉군이다.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이곳에 세종을 이은 조선의 제5대 왕 문종도 현덕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릉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이 폐위되고 추폐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었는데 이때 문종의 옆으로 이장되었다.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은 세종대왕의 장남이다.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장자 승계 원칙은 번번이 어긋났다. 태조가 뜻밖에도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이 원칙이 꼬이면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과 함께 형제간 피바람이 불었다. 형제간 비극을 몸소 겪은 태종은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로 정했지만 끊임없는 불화 끝에 결국 양녕을 폐세자 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래서 비로소 문종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무척 총명하고 덕이 있었다고 한다. 성품이며 학식이며 능력이 아버지 세종을 꼭 빼닮았던 것이다. 당시 세종이 ‘천 년에 다시없을 성군’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의 닮은꼴 세자에 대한 조정 안팎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7살에 세자에 책봉된 문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랫동안 세종 곁에서 국정을 살폈다. 특히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31살 때부터는 대리청정을 통해 5년 동안 사실상 국왕으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세종 집권 후반부 업적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30년에 걸쳐 국정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원숙한 나이인 36세에 보위에 올랐으니 문종은 최초의 적장자 계승이라는 정통성에다 자질과 경험까지 갖춘 말 그대로 준비된 국왕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세종 시즌 2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왕위 찬탈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날의 비극에 앞서 벌어진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문종의 세자 시절로 돌아가 보자. 세자 시절, 문종은 세자빈을 3명이나 잃었다. 먼저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 씨와는 13살에 혼인했다. 하지만 네 살 연상의 세자빈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휘빈은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며 해괴망측한 사술을 부리려다 발각돼 궁에서 쫓겨났다. 곧바로 순빈 봉 씨라는 두 번째 세자빈을 맞았는데 성격이 직설적이고 다혈질이어서 차분한 성격의 세자와 맞지 않았다. 역시 부부 사이가 냉랭했는데 결정적으로 순빈이 여종과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폐위돼 궁을 떠났다. 세 번째 세자빈은 당시 세자의 후궁이었던 권 씨를 승격시켜 책봉했다. 권 씨는 아들이 없던 세자와의 사이에서 마침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훗날의 단종이다. 하지만 권 씨는 출산 다음날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후 문종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세자빈이든, 왕비든, 정실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왕 27명 중 유일하게 왕비가 없는 왕이었다. 동구릉 내 현릉에 문종과 나란히 묻혀 있는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죽은 세자빈 권 씨가 훗날 왕후로 추존된 경우다.
문종이 보위에 오를 때 아들 단종의 나이는 9살이었다. 문종의 세자 시절 혼인관계가 원만했다면 더 장성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더욱이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3년 상을 엄격하게 치르면서 동시에 국사를 돌보느라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결국 세종 시즌2를 열 것으로 기대됐던 문종은 보위에 오른 지 2년 2개월 만에 11살 아들 단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단종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어머니 현덕왕후, 그리고 아버지 문종까지 자신을 돌봐줄 혈육이 모두 떠나고 수양대군 등 기세등등한 숙부들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최고의 가정교사인 세종대왕에게서 국왕 수업을 받았던 준비된 군주 문종!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 없다지만 만일 그가 아버지처럼 오래 보위에 있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