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아침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조선왕릉 탐방 시작이다. 동구릉은 말 그대로 ‘한양 도성의 동쪽에 있는 아홉 개 능’이다. 조선의 1대 왕 태조의 건원릉으로부터 1855년(철종 6) 문조(추존왕. 효명세자)의 수릉까지 약 45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군이다. 얼마나 길지였으면 9개의 능이 이곳에 모여 있을까?
조선 왕릉은 총 42기다. 그중에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인 신의왕후가 묻혀있는 제릉과 2대 왕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등 2기는 북한 개성에 있고 그 외 40기는 모두 남한에 있다. 그 시대의 유교와 풍수사상에 의한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어 지난 2009년 6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왕릉은 도성 10리(4km) 밖, 100리(40km) 안에 두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릉 주변에는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도성과 너무 가까우면 안 되고 10리를 넘기지 않은 것은 당시 왕의 행차로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구릉은 왕 6명과 추존 왕 1명 왕비 10명이 모셔져 있는 조선 최대 왕릉군이다. 필자는 입구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면서 왕과 왕비들을 만났다.
동구릉 전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수릉.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와 신정황후가 묻혀 있는 곳이다. 효명세자는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며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안타깝게 22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익종으로, 다시 문조로 추존됐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씨가 효명세자 역을 맡았다. 참고로 조선 왕은 모두 27명인데, 죽은 후에 왕으로 추존된 사람 즉 추존왕도 9명이나 된다.
이어서 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 있는 현릉. 조선왕릉 입구에는 모두 문이 하나씩 있는데, 바로 홍살문이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문이다. 붉은색은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뜻이 있다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돌로 된 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가운데 조금 더 도톰한 길이 ‘향로’, 즉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길, ‘어로’다.
홍살문
왕릉에서 한 중간에 우뚝 서 있는 가장 큰 건물이 정자각인데 이곳에서 제향을 지낸다. 정자각 뒤편으로 크고 높다랗게 언덕이 조성돼 있고 바로 그 언덕 위에 봉분이 있다. 일반인은 언덕 위로 올라갈 수 없어서 사실 능의 세세한 모습을 관찰하기는 어렵다.
헌릉의 주인인 문종은 세종대왕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3년 상을 너무 극진하게 치러서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은 동구릉의 대표 격인 건원릉이다. 태조 이성계가 묻혀 있는 곳이다. 고려말 무인으로 활약하다 1392년에 조선을 창업했다. 그러나 개국한 지 6년 만에 다섯째 아들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임금 자리를 내놓았다.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필생의 동지 정도전도 방원의 칼에 잃었다. 태조는 이후 10년을 원망과 회한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봉분은 잔디가 아니라 억새로 뒤덮여 있다. 태종이 태조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 지역의 억새를 가져와서 덮었다고 한다. 숱한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새 나라를 세운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마음은 고향의 풀냄새를 그리워한 것일까? 왕릉 한쪽에 조그만 억새밭이 있는데 매년 한식이 되면 이 억새를 봉분 위에 옮겨 심는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자 방원 형제의 어머니인 신의왕후의 능은 북한에 있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는 서울 정릉에 묻혀 있다.
억새로 뒤덮인 건원릉 능침구역
건원릉 오른편에 있는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그의 부인들인 의인왕후, 인목왕후가 묻혀 있다. 선조 하면 임진왜란이 먼저 떠오른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보름 만에 선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란을 떠났다. 개경, 평양, 그리고 의주까지 피신해 아예 명나라로 넘어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조선왕 중 세 번째로 긴 4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이황, 이이, 허준 등 인재들을 다수 배출했지만 국가적 위기에 무능했던 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조는 또한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으로 처음 왕이 되어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래서인지 후궁 소생인 광해군을 이미 세자로 책봉했음에도 불구하고 50살에 18살 밖에 안 된 인목왕후를 새로 들여 영창대군을 낳아 훗날 비극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휘릉은 16대 왕 인조의 두 번째 왕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단릉이다. 장렬왕후는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서인과 남인 간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선 사람이다. 바로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아들인 효종과 그의 왕비, 그리고 다음 왕인 현종이 승하할 때마다 장렬왕후가 상복을 3년간 입어야 한다, 아니다, 1년이다, 9개월이다 를 놓고 정치 세력 간에 허구한 날 이전투구를 벌인 것이다.
다음은 21대 왕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묻혀 있는 원릉이다. 영조는 천한 무수리 출신 소생이라는 한계를 딛고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 평균 수명이 40대 중반인데 영조는 83년을 살았고 재위 기간도 52년으로 가장 길다. 그는 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정치, 경제, 국방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이뤘다. 조선 후기에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영조는 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고 모두 후궁에서 2남 11녀를 얻었다. 그중 영빈 이 씨 소생이 사도세자다. 누구보다 훌륭한 왕으로 키우고자 자식을 채찍질했던 영조, 아버지의 간섭에 숨 막혀했던 사도세자. 두 사람 사이의 비극은 송강호와 유아인이 연기한 영화 <사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영조릉에 서려 있는 조선 왕실의 비극을 느끼며 발걸음 돌려 다다른 곳은 경릉! 경릉에는 조선 후기 1800년대 제24대 왕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후 2명 등 봉분 3기가 나란히 조성된 것은 경릉이 유일이다. 헌종은 앞서 지나온 효명세자의 아들로 조선왕 중 최연소인 8살에 임금이 됐다. 그가 다스리던 15년 간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의 세도 정치가 극심했고, 역병과 기근, 역모, 천주교 탄압, 서양 군함의 출몰 등 조선은 혼란과 쇠락의 모습이 뚜렷했다. 군왕으로서 이 모든 것에 무력하기만 했던 그는 말없이 지하에 잠들어 있다.
다음으로 혜릉의 주인 단의왕후는 20대 왕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신분일 때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왔다. 그러다 남편이 임금이 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후 왕후로 추존됐다.
동구릉에서 볼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은 숭릉. 18대 왕 현종과 명성왕후가 모셔져 있다. 숭릉의 정자각은 다른 왕릉과 달리 유일하게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보물로 지정돼 있다. 현종의 아버지는 효종이다. 효종이 왕자일 때 이름이 봉림대군. 병자호란 때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서 지내던 중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훗날의 현종이다. 그래서 현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숭릉 정자각
수릉, 현릉, 건원릉, 목릉, 휘릉, 원릉, 경릉, 혜릉, 숭릉 등 각각의 이름이 다르듯이 주인공들의 살아온 시대도, 삶의 이야기도 다르다. 하지만 83세를 산 영조대왕도, 그리고 2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효명세자도 그 모든 영화로움을 뒤로한 채 시대를 초월하여 같은 곳에 잠들어 있다. 보통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동구릉의 주인은 왕릉이지만 검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권역 전체가 공원처럼 잘 조성돼 있다. 흙길이 반듯하게 나 있고 숲이 무성해서 누구나 부담 없이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가끔 왕릉 길을 걸으며 지난 나의 삶도 한 번씩 돌아본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