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어느 암보호자의 이야기
'딴 다단 따 딴따 딴따단'
새벽 3시, 한국시간 오전 11시.
보이스톡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밤새 기다리던 전화였거든요.
"어. 뭐래? 어떻게 하기로 했어?"
"누나, 일단 매형 방사선은.. 조금 미뤄보기로 했어"
오늘은 제 남편이, 암 절제 수술 후 방사선 치료 여부를 결정받는 날입니다.
저는 하던 일 때문에 아직 프랑스에 남아있는 중이라, 제 대신 한국에 있는 저의 남동생이 남편의 보호자를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함께 외래 진료를 본 뒤, 저에게 곧장 연락을 주기로 했었는데 바로 그 전화였습니다.
내용을 들어 보니, 다행히 방사선과 교수님이 보시기에 남편의 상태가, 아직 방사선치료를 했을 때 득 보단 실이 많은 상태인 듯했습니다. 조금 더 추적검사를 하며 지켜본 뒤 결정하기로 했죠.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직 남편의 상태가 좋은 것 같아 오랜만에 웃음이 좀 지어지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어차피 감당해야 할 불행을 미뤄두기만 한 것 같아 금세 마음에 꺼끌함이 남습니다.
"아.. 그래. 오빠는? 오빤 괜찮아?"
"응 옆에 있어. 바꿔줄게."
찜찜함을 떨치지 못하는 저와는 다르게, 살짝 들뜬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응 여보! 나 방사선 바로 안 해도 된대! 들었지?"
아직은 방사선까진 안 갔으니, 건강관리 잘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겠다는 쾌활한 목소리에, 제 마음은 산란해집니다.
환자가 우울해하거나 기가 죽어 있으면, 그것만큼 보호자 마음이 아프고 속상할 때가 또 없습니다만, 반대로 이렇게 너~무 별일 아닌 듯 말하면 그건 그거대로 행여나 관리태만을 할까 싶어 조마조마합니다.
암 환자 보호자는
이러나저러나 마음이 불안한 건
언제나 매 한 가지입니다.
사실, 저는 암환자 보호자이면서 이공계 학술 연구개발자입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보면, 그중 기초 의학 연구자에 해당합니다.
제가 하는 일을 학술적으로 설명하자면, 환자들에게서 채취한 샘플을 가지고 공통적으로 발현이 증가 혹은 감소되어 있는 특정 주요 유전자나 단백질들을 발굴합니다. 또, 질병 메커니즘에 대해서 연구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진단마커나 예후예측인자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특허로 등록을 하기도 합니다.
조금.. 복잡한 설명이죠? 그래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연구개발자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시더군요. (물론 저희 부모님들도 포함해서 말이죠.) 하하.
좀 간단히 말해보면.. 암 연구원들이 하는 일은 암 환자들만 공통으로 갖고 있는 유전 정보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또, 암이 생겨나면 몸속 세포에서 어떤 신호들이 켜지는지도 연구하고요.
이렇게 찾은 결과들은,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하고, 임상에서 실제로 의료진들이 사용하는 '치료 가이드라인'을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물론 제약회사들이 진단키트를 개발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요.
최전선에서 수고하시는 의료진분들 만큼은 아니어도, 저희 역시, 늘 이렇게 암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암 연구'라는 복잡한 과정에서, 저희 같은 암 연구원들이 필수적으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또 있습니다. 바로 환자들의 생존율 분석과 약제내성을 예측해 보는 일입니다.
듣기만 해도 부담감이 팍! 오는 이 일은, 전 세계 모든 연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포털 속의 수많은 환자 데이터들까지도 전부 다~ 이용해 분석하는 일입니다. 저희가 찾은 후보 바이오마커가 과연 제대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평가해봐야 하니까요.
후보 물질과 환자군의 생존율, 재발률, 약제내성 등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최대한 많은 환자데이터를 이용해 분석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실제로 임상에서 사용했을 때 그 결과에 좀 더 높은 신뢰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여기에 98% 니, 93% 니와 같은 숫자들로 계산된 통계적 유의성 역시 꼭 감안되어야 하고요.
흔히, '논문에서 보니까 이러이러한 사람은 **암 생존율이 몇 %래' 하는 그 숫자들은 이렇게 계산됩니다.
오랜 시간
이렇게 암을 공부해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저는 암 환자 보호자가 됐습니다.
남편이 쓰러지고 제가 암 환자 보호자가 된 바로 그날도, 평소와 같이 암과 함께 보내던 어느 보통의 날이었습니다. 인생의 1/3이란 시간 동안, 연구 대상으로 늘 내 옆에만 있던 암이 한 발짝 제게로 다가 온 순간이었죠.
딱 한 발짝이었을 뿐인데. 정말 딱 한발짝 이었을 뿐인데.
그 한 발짝은 제 인생에 큰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들 투성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보는 일도, 사적인 이유로 상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다양한 의료보험공단 제도며 보험약정과 관련된 용어들도 공부해야 하는 일도,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는 일도 모두 처음해 보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항상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야로 암을 연구해야 하는 암 연구원과,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암 환자 보호자,
덜렁 이 2개의 타이틀만 쥔 채 지금 암과의 긴긴 전쟁에 참전 중입니다.
의사도 환자도 아닌, 암 연구자와 암 환자 보호자.
어찌 보면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주변인의 보통의 이야기(혹은 하소연).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