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Jul 25. 2023

'창고' 앞으로 내몰렸던 그때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는 지금 씁니다.

죽어야만 끝나나 생각하면서 어디서 죽으면 내 목소리가, 내 억울함이 풀릴까 했을 때 떠올린 장소는 학교였다. 학교에서 학부모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너무나도 괴로웠으니까. 감히 그때의 나는 '창고' 앞에 서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 많은 교사들이 그 앞을 반강제로 서성여보았으리라.


주된 원인은 관리자의 갑질이었지만, 그 시작점에 있었던 교권보호위원회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되짚어보니, 이런 학부모도 있었다.


"선생님, 솔직히 몇 살이에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애가 없어서 모르셔서 그래요."

초임, 어렸다. 대학도, 임용도 재수를 했지만 만으로 24세. 학부모총회에 오신 학부모님이 물으셨다. 맞다, 어렸다. "몇 살로 보이세요? 보이는 것보다 많아요.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왜 물어보시나, 어린 걸 알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왜냐면 자매품으로 "애가 없어서 모르셔서 그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를 둘이나 낳은 지금은, "아직 애가 어려서 몰라서 그래요."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들이 있으니. 그러나 전공공부도 4년이나 했고, 현장경험이 10년이 넘으며, 그동안 본 표본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3천 명은 될 거다. 그렇지만 아직도 저런 말을 듣는다.




"우리 애 체육대회 반티가 너무 커요. 바꿔주세요.", "퇴근시간이 늦어 그때 알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한번 대충 입고 버려지는 반티는 돈 낭비, 환경오염, 갈등유발이라는 세 가지 이유로 싫어하여 학급을 맡을 때마다 설명하지만 아이들은 꼭 반티를 맞추고 싶어 했다. 별수 없이 아이들에게 의견수렴을 맡기고 필요한 일을 돕는 정도의 역할만을 고수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학부모님의 돈을 내고 구입하는 것이니 구입처와 상품명과 사진, 사이즈 조견표를 각 가정에 안내하여 사이즈를 회신받아 일괄구매했다. 그런데 배송받은 옷을 나눠준 다음 날 아침 문자가 와 있는 걸 확인했다. 무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우리 애 체육대회 반티가 너무 커요. 바꿔주세요."라는 문자가 말이다. 아, 크구나, 바꿀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생각하고 일단 학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연락 주신 시간이 늦어 죄송하게도 아침에 확인했노라며 구입처 고객센터에 문의 후 연락드리겠다 했다. 그러자 돌아온 말, "퇴근시간이 늦어 그때 알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잘 모르겠다. 그게 그렇게 촌각을 다룰 만큼 급한 일이었는지. 안내드린 구입처를 통해 해결할 방법은 없었던 건지... 아무튼. 불행하게도 고객센터에서는 맞춤옷이라 사이즈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고 전달했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나에게 몇 번이고 되묻고 따졌다. 난 반티가 더 싫어졌다.




"내가 이 새끼 교복하고 교과서 하고 가방하고 다 불태울 겁니다.", "교사면 애가 교복을 왜 못 입을 수밖에 없는지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교복이 없으면 지적할 게 아니라 좀 사주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학교가 끝나고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연락이 왔다. 걱정이 됐다. 아이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이와 친한 학생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 ㅇㅇ이가 자기 집에 있다고, 여기서 자고 가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학부모님께 전달했더니, 다짜고짜 "내가 이 새끼 교복하고 교과서 하고 가방하고 다 불태울 겁니다."라고 했다. "아버님 진정하시고요..." 당시 소개팅을 하러 가고 있었는데(아 갑자기 생각나네-), 아주 매너가 좋으신 상대분께서 약속에 1시간 반이나 늦는 바람에(난 왜 기다린 거냐) 학부모님과 길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별 문제도 없었고 오히려 좀 귀엽고 정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 애의 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형편없이 못된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이를 두둔하는 말을 계속했다. 다행히 아이는 주말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에도 잘 나왔다.


시간이 흘러 날이 추워지자 그 아이는 교복 위에 외투를 입고 다녔는데 교칙상 외투는 교복 재킷 위에 입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은 그 아이는 계속 지적을 받았고 나는 아이와 대화한 후, 아무래도 정말 교복을 태웠던 것 같아서 학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교복이 없다고 하니 필요할 것 같다고. 아이가 좀 곤란한 상황이라고. 그랬더니, 돌아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교사면 애가 교복을 왜 못 입을 수밖에 없는지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교복이 없으면 지적할 게 아니라 좀 사주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아버님, 전 물어봤구요, 제가 그때 태우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후. 참고로 소개팅도 쫑났다.




"이러면 학폭 신고할 겁니다.“

덩치 큰 남자아이 A가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 B를 때렸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며칠 안 되었을 시기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 부모님은 아이가 학교 입학 후 어떻게 생활하는지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살펴보고 있었으리라. 덩치가 워낙 작은 아이라 더 예민하게 경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A는 때렸고, B는 맞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B가 A를 상당히 약 올리긴 했으나, 맞은 것은 B였고, 지방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에 별 수 없이 개인번호로 연락을 했다. 출장 중이라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부모님 번갈아가며 연락이 왔다. 자식이 걱정되어 그럴 수 있다 싶었지만 다음날 학교에 가서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하는 사항도 당장 답변을 해주길 원해 좀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그럴 수 있지 생각했다. 다음 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연락을 드렸더니 사과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과편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사과편지는 학폭법에 의해 학교폭력위원회의 조치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그냥 요구할 수는 없다. 이를 설명했더니, “저도 학교에 있어서 아는데... 이러면 학폭 신고할 겁니다.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결해 주시고 사과편지도 받아주셔야지, 안 그러면 학폭 신고할 거예요. “ 울고 싶었다. 학폭 신고를 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사과편지를 받아달라며 학폭 신고를 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하다니(이럴 땐 절차를 밟는 게 더 낫게 여겨진다만). 후- 어떤 학교에 어떻게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교사니까.



"얘는 잘못 없어요. 다 걔네 때문이에요.", "요즘도 그래요? 또 그래요?"

한 아이가 학급의 다른 거의 대부분의 아이를 괴롭혔다. 이유 없이 때리고 욕을 했다. 물건을 던지고 날카로운 물건으로 뒤통수를 겨눴다. 당한 아이들은 대체로 피하려고 했지만 매일 짧게는 7시간, 길게는 8시간 가까이 함께 하는 학교의 특성상 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꾸준히 당하던 아이들 중 몇 명은 울었고, 몇 명은 욕을 했고, 또 몇 명은 무시했다. 학급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학생의 부모님께 연락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얘는 잘못 없어요. 다 걔네 때문이에요.”였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다른 애들이 자극이 되었을지언정 해당 학생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심지어 본인도 괴로워했다. 자기도 안 그러고 싶고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교내 상담실인 위(wee)클래스(전문 상담교사 상주)에 가는 것이 어떤가 권유했지만 만 14세 미만이었던 그 학생의 부모님이 강력히 반대하여서 결국 가지 못했다. 학교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학교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수많은 아이들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종종 반말을 했다. 몇 번이고 경고를 주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또 다른 젊은 선생님에게도 반말을 하고 실수인 척 얼버무렸다. 그럴 때마다 마찬가지로 학부모님께 연락을 취했지만, “요즘도 그래요? 또 그래요?”라고 할 뿐,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거나 잘 가르치겠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화났고 무기력했고, 이쯤 되면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나 딱 그러한 생각까지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몇 번이고 좌절하며 몇 번이고 ‘창고‘ 앞으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살아있는 지금 쓴다. 이랬었노라고. 남겨본다.





*사진출처:pexels




서이초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전 09화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었다(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