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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ul 21. 2023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었다(2)

나 또한 혼자였다. 철저히.

2020년,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훗날 나를 공황장애로 몰아넣는 갑질을 한 교장, 교감에게 손을 잡아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뭐 그땐 그럴 줄 몰랐으니까. 순진했다. 멍청하게도.






2018년 12월 절박유산(유산은 아닌데 유산 위험이 있다는 것) 진단을 받고 병가를 냈을 때 학부모의 전화를 지속하여 받았다. 2019년 담임을 희망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나 '만약에 담임을 한다면 몇 학년을 하고 싶으냐'면서 지속해서 희망학년을 쓰라고 했다. 그렇게 2019년 어쩌면 '자의에 의해' 담임을 맡게 되었다. 투넘버 서비스를 신청했다. 하나의 핸드폰, 하나의 유심인데 번호를 두 개 쓸 수 있는 부가서비스였다. 그만큼 원래의 번호는 학부모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번호가 유출되었다. 퇴근 후 학교로 전화한 학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학교에서 알려준 것이다.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 개인정보니까. 그런데 교사는 그래도 되나 보다(인간이 아닌가).


마침 그날 핸드폰이 고장 나 수리를 맡겼던 나는(심지어 학생들에게 말도 했다) 전화를 못 받았다. 다음 날 연락하니 퇴근해서 받기 싫어 안 받은 것 아니냐 묻던 학부모는 아무 때나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있을 때고 없을 때고 출근 시간 이전이고 퇴근 시간 이후고 무관하게 연락이 왔다. 가족이 아파 연가를 사용했는데 '그건 선생님 개인사정이 아닌가요? 그것까지 이해해야 하나요?'라고 하며 연가에 대해서 관여했다. 참고로 교사는 연가를 정말 잘 못쓴다. 가족이 대학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 정도 해야 연가를 쓸 수 있다. 사정을 말했으나 저렇게 말했다. 교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유, 왜 그러나' 하고 말았다. 


학생들과도 잘 지내고 수업도 열심히 했던 나는 수업시간에 찾아와 교실 뒤편에서 나를 노려보고 가던 그 학부모의 눈빛과 옷차림이 생생히 기억난다. 꽃블라우스에 빨간 스커트를 입고 팔짱을 끼고선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수업하는 나를 아주 마뜩잖게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단번에 그 학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리 내가 못마땅했을까. 그 학부모는 교육청에도 민원을 넣었다. 학교에서 정해진대로 보고서 양식을 지켜 제출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게 부당하다고 민원을 넣은 것이었다. 학교는 그러면 그게 그렇게 정해진 거라고 답변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보고 그냥 원하는 대로 제출하게 하라 했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해 건강이 너무 안 좋아 여러 질병이 한 번에 들이닥쳤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수술도 두 번이나 받았다. 병가를 사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면 휴직을 했어야 했는데 담임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 학부모는 '기다렸다'면서 '학교로 찾아오겠다'라고 했다. 와서는 1학기 성적표를 들이밀고 수정해 달라고 했다. 명백한 교권침해였다. 당시 내 자리는 교감 자리 바로 옆 부서였다. 주변 선생님들도 교감도 그 요구를 다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거나 돕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름 녹음도 하고 나이스에 기록도 해두고 그랬지만 사실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냥 나를 좀 내버려 두었으면 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내 배 아파 낳아 평생 데려갈 내 자식보다도 한 해 함께 하는 남의 자식을 더 따뜻하게 대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학부모의 아이에게도 그랬다. 그런 나를 믿어주길 바랬다. 그런데 마지막 행동은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어 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요구했다.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1. 그거 열어본 적이 없어서 우리 학교에서는 누구 업무인지 모른다.


학교는 3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2월, 업무분장을 한다. 누가 무슨 일을 할지 업무분장표에 적고 내부결재를 득한다. 그런데 누구 업무인지 모른다니. 알아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고, 교권보호위원회도 결국 교사의 일이 된다는 거다. 여기서 1차로 망설이게 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내 동료에게 또 업무가 과중되는구나 싶어서 주춤했다. 분명 피해자인데 폐를 끼치는 기분이었다.


2. 꼭 열어야 하냐, 선생님만 다친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황당했다. 그럼 당하고만 있으라는 말인가. 업무 담당자라 하는 말인가. 그런데 지나고 나니 헷갈렸다. 저 말은 진짜 날 걱정해서 했던 말이었나. 교권보호위원회는 말 그대로 교권을 보호하기 위해, 교권 침해 사안에 대해 열리는 회의다. 교사와 학부모, 변호사, 경찰이 참여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가 들은 말은 '24시간 연락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는 거였다. 내가 알기론 사안이 법적으로 위법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변호사와 경찰이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걸로 아는데, 그 둘이 그렇게 말했다. 녹음한 내용을 듣고도 성적표를 고쳐달라고 한 것이 교사의 평가권을 침해했나를 따지는 게 아니라 욕설이나 고성을 지르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했다. 오히려 나만 질타받고 있었다. 학부모위원이 있기에 교사는 편들어주냐는 말을 들을까 봐 아무 말도 못 했다. 이게 뭔가 하는 생각으로 나와 허탈하게 서있는 나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동료교사가 안아주었다. 그 안에서 펑펑 울었다. 




당연히 처분은 나오지 않았고, 회의록을 열람하니 내가 나가고 난 뒤, 교감은 '교사가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라고 했다. 결과에 대해 항소처럼 이의제기를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나만 다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갈기갈기 찢기고 싶지 않았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자신들이 연락처를 알려줬고(그에 대해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학부모 민원에 학교의 교칙과 무관하게 편의를 봐줬고(이 역시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지속된 민원을 외면했는데(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하지 않았고 즉,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알아서 지쳐 나가떨어지는 게 아니라 감히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 귀찮게 했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지독하게도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




*사진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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