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센스, 나의 동아줄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좀 빠른 편이었다. MBTI를 보면 두 번째가 N으로 직관형이다. 직관형은 사람, 사물, 사건 등을 경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촉, 육감, 느낌을 통해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상황파악이 빠르고 사람에 대한 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대체로 정확했다.
중학생 때 친구들 무리에서 은근히 따돌리려고 시도한 친구의 행동을 하루이틀 만에 눈치채고 직접 따져 물었던 일, 활발한 친구에게서 싸함을 느꼈음에도 친하게 지냈는데 지내다 보니 장난이라는 미명하에 친구를 함부로 대하고 진짜 대화다운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라는 걸 깨달았던 일, 고등학교 때 동아리 선배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려고 가짜 기강을 잡는 것을 눈치챘던 일, 대학생 때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피운 것을 눈치챘던 일,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나자마자 결혼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일 등. 근거도 없이 그냥 그럴 것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된 경우가 정말 많았다.
게다가 부모님의 사업 부도라든가,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든가, 재수를 했다든가 하는 나름의 굴곡을 겪으면서, 용돈을 벌기 위해 대학 4년 동안 17개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데이터는 쌓여갔다. 다행히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성향을 보완할 수 있는 태도-인간에 대한 믿음, 호기심, 호감을 바탕으로 촉이 와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데이터의 신뢰도는 높아졌다.
그 촉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웃음은 가짜야, 조심해.
전근 이후 발령 나자마자 육아휴직을 한다고 밝혔던 그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는데, 다른 사람들이 말해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판단을 2년간 미뤄왔는데, 노트북 액정에 금이 간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장은 구렁이다. 저 웃음은 진짜가 아니다. 웃으며 깔아뭉개고 통제하려 든다. 저 뒤에 음흉한 속내에서 구린내가 난다.
평소 같으면 일단 지켜보는 것을 택했겠지만 웬일인지 그 촉을 믿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핸드폰을 켜고 음성녹음 어플의 빨간 버튼을 눌러 대화를 녹음했다. 노트북을 자비로 고치라는 것도, 직접 고객센터에 다녀오라는 것도, 연가를 쓰지 말라는 것도, 육아시간을 쓰지 말라는 것도. 일단 녹음을 했다. 어디에 어떻게 쓸 생각은 없었다. 근데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다. 그게 나의 동아줄이었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