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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Dec 13. 2022

너무나 멀쩡한, 멀쩡해야 하는

아파야 하고, 아프면 안 되는

공황 장애의 괴로운 점은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멀쩡한데 혼자만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숨이 콱콱 막히고 손발이 저려와 주저앉는다고 해서 남이 보기에도 죽을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피가 나거나 호흡이 멎어 기절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처음엔 안도감을 느꼈다. 내로라하는 대학병원의 교수가 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질병이 있다고 확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장, 교감에게 더 이상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으므로. 힘듦을 증명해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러나 또한 너무 멀쩡해 보이진 않을까 두려웠다. 억울하고 불안하고 힘든데 그것이 티가 나지 않아 괴로움이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과 환경에 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약을 복용하면서는 교장, 교감, 교장실 등의 위협적 요소가 있지 않은 때에는 증상의 빈도와 강도가 줄어 밥도 조금씩이나마 먹기 시작하면서 흙빛이었던 얼굴도 조금 나아졌다. 진단을 받은 뒤 오히려 멀쩡해진 것 같이 보였으리라. 같은 부서 부장은 교감선생님에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사람이었기에 어느 날은 너무 밥을 잘 먹었나, 너무 크게 웃었나 하는 자기검열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분노와 원망이 멈추지 않았다. 아프고 싶지 않은데 아픈 것도 억울한데 아픈 사람임을 표현하고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니. 나아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끼면 안 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긴장되었다. 아프면 안 됐기 때문에. 학생이, 학부모가 내가 정신병원(신경정신과가 옳은 표현이다)에 다닌다는 것을 알면 어떡하지, 민원이 들어올 텐데. 절대 들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간 날은 날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스스로는 정신병원에 내원하여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나 상담기관을 통해 상담하는 것이 오히려 용기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남들의 시선-특히 학생과 학부모의 시선-에는 자유롭지 못했다. 전후 맥락을 모르고 현재 상황만을 보고는 공격을 해오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지켜 낼 힘이 없는데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멀쩡한 척해야 했다. 민원이 들어오면 안 돼. 그러니 숨이 막혀도, 공간에서 분리되는 느낌이 들어도 절대 아픈 사람인 것이 드러나서는 안 돼.






그렇다면 집에선 편했을까. 집에서도 아니었다. 남편은 병명과 병증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아이는 그런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맑고 어렸다. 솔직히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가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남편의 권유였지만 두 번째는 불안을 아이에게 전가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므로. 그래서 집에서도 멀쩡해야 했다. 최대한 밝게, 의지 넘치는 모습으로 아이를 대했다. 때로는 힘이 죽죽 빠지기도 했지만 나의 빛, 나의 보석이 웃는 모습을 보면,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고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원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볼 땐 너무 잘 살고 있는 자식이었기에 무엇보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 더 상처받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더 큰 상처와 실망과 갈등은 겪고 싶지 않았고, 더 힘들면 이마저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픈데 너무 멀쩡해 보이는 그래서 아픔을 증명해야 하는, 한편으로는 아픔을 숨기고 멀쩡한 척해야 하는 이상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Photo by Myriam Zille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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