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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15. 2023

주의. 빈대출몰

빈대가 새끼들을 데리고 필리핀에 출몰했다



몸만 오라는 친구말(남편이 아닌 사람에게 설렘을 느꼈다 (brunch.co.kr) 참고)에 한국에서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라며, 면세점에서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라며 큰소리쳤다. 남에게 피해 주고 신세 지기 싫어하고 불편해하는지라 몸만 오라고 하더라도 그럴 순 없지 하면서 이것저것 바리바리 짐을 챙겼다. 유모차도 가져가야 하고 접의식 아기의자도 필요하다. 없으면 8개월 아기는 기어 돌아다니며 저지레를 하여 밥을 제대로 먹일 수가 없으므로 당근에서 중고로 얼른 샀다. 이게 있냐 없냐에 따라 나도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므로(중요⭐️⭐️⭐️⭐️⭐️).



이렇다 보니 캐리어는 24인치 단 하나여야 한다. 그 안에 야무지게 채워 넣기 위해 동생에게 생일선물로 의류압축가방을 요청하여 받아두었기에 알차게 채워 넣었다. 어라, 이유식을 넣어야 하는데 공간이 없다. 무게라도 재보자 하고 남편의 여행용 손저울로 무게를 달아보니 세상에 마상에 14.7kg. 나에게 허용된 건 단 15kg뿐인데. 벌어진 입을 다물고 남편에게 등산용 가방 중 제일 가볍고 예쁜 것 좀 달라 하여 압축백 중 제일 무거운 걸 옮겨 넣었다. 그리고 내 물건을 하나하나 뺐다.





10년 전에 태국에서 산 동남아 무브 원피스. 수유하려면 어차피 불편할 테니 친구옷을 입자. 친구야 네가 몸만 오라 했다? 신혼여행에서 샀던 샌들을 뺐다. 가져가서 신고 버리고 오려했는데 미안하다. 좀 빨리 이별해야겠다. 뺀 김에 봉지에 담아 묶고 버려버렸다. 그다음 화장품. 어차피 쿠션에 눈썹 바르고 입술 바르면 풀메이크업인데 저녁비행기니 비행기에서 잘 수도 있고 도착하면 늦은 밤이다. 친구집에 가서 대충 세수하고 이 닦고 잠만 자려면 얼굴은 오히려 비우고 가자. 화장품은 친구야, 네가 더 많을 거다. 선크림도 동남아에 사니 무조건 있겠지. 없으면 사러 가자고 해야지.




그렇게 남은 것은 속옷과 수유패드, 양말 한 켤레, 크록스 한 켤레가 전부. 나머지는 아이들 내복 2-3벌, 여벌옷 4-5벌, 속옷, 수영복, 튜브 등 친구네 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유식! 8개월 된 코딱지는 아몬드가루 테스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기에 타지에서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에 미친 듯 이유식을 만들어 얼려놓았다. 이걸 꼭 가져가야 제일 염려되는 아기의 컨디션이 결정되므로 8박 9일 동안 먹을 이유식을 아이스백에 담아 넣었더니 무려 3kg. 부피가 큰 기저귀는 가서 사기로 하였으니 당장 쓸 하루이틀 치만 담는다. 그래도 캐리어가 만원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것은 없이, 환전도 없이, 즉 현지 돈 한 푼 없이 떠났다. 막상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이 아이들 데리고 친구가 마중 나온다는 말만 믿고 너무 빈털터리로, 친구네 집 가는 방법도 알아보지 않고 출발했나 싶은 생각이 밀려왔지만 아기가 울까 봐 전전긍긍하느라, 자꾸 화장실 가고 싶다는 첫째를 데리고 진땀 빼느라 4시간이라는 비행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기에게 너그러운 필리핀, 공항에 도착하자 베이비를 외치며 기다리지 않고 수속을 밟고 짐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잠시 맡겨두었던 캐리어와 유모차를 끌고 아기는 아기띠로 앞으로 매고, 등에는 배낭을 멘다. 일부러 얇게 입고 나왔던 겉옷마저도 후끈한 공기에 덥게 느껴져 접이식 가방을 펼쳐 넣으니 이것도 짐이 된다. 피곤해하는 큰 아이에게 자기 가방을 들게 한 뒤 유모차에 실어서 나갔다가 입국 수속뒤엔 유모차에 짐만 실어 네가 밀어라 하고 함께 터미널을 걸어나간다.





있다. 날 설레게 했던 친구가 있다. 거짓말처럼 똑같이 핸드폰으로 서로의 영상을 찍고 있다. 낯선 공간인데 하나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친구를 한 번 안고 햄버거를 먹자며 졸리비 가게로 들어간다. 계산은 친구가 한다. 난 돈이 없으므로. 그렇게 빈대생활을 시작했다.



친구야. 돔황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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