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수술을 정복한 넷째
" 와, 미치겠다, 말도 안 돼."
테스트기를 본 순간 내뱉은 말이었다.
2020년 여름. 나는 임신을 했다. 또.
넷째였다.
셋째는 2017년 11월에 태어났다. 아들 둘에 막내딸이라는 완벽한 조합. 더할 나위 없었다.
셋째가 백일 즈음 남편은 이제 다 가졌으니 정관수술을 하겠다며, 씩씩하게 수술을 받고 왔다. 수술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무정자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지만 남편은 가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수술을 얼마나 꼼꼼하게 하는데 뭘 또 검사까지 하러 가냐며. 병원 가서 정자를 빼는 것도 이상하고, 집에서 빼서 가져가는 것도 너무 이상하지 않냐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단다. 생각해보니 좀 민망한 검사과정이긴 했다.
종종 우스갯소리도 하곤 했다. 수술도 했는데 임신하게 되면 이혼 도장 찍어야 한다느니, 그럼에도 생긴다면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이니 꼭 낳아야 한다느니 하는 농담들 말이다. 이런 실없는 말들이 씨가 될 줄은 그땐 몰랐지.
큰아이 초등 입학과 코로나가 겹쳐 휴직을 했던 터였다. 세 아이를 가정 보육하며 정신없는 나날이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운동이 답이다라는 생각에 요가도 다니고, 유튜브 보면서 홈트도 하며, 그렇게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소화가 안됐다. 소화제를 먹고, 매실을 먹고, 양배추 효소도 먹기에 이르렀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아, 늙었나 보다. 소화는 자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졸았고, 갑자기 멀미를 했고, 입맛도 없어졌다. 역시 애 셋은 힘들어라며 애써 나를 위로하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촉이 왔다. 여러 번의 경험(?)상 이미 내 몸이 말을 해주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그놈의 촉. 꽤나 정확한 임신에 대한 나의 촉. 휴대폰 달력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예정된 날로부터 2주가 넘게 지나있었다.
‘에이 설마 수술했는데 생긴다고? ’
테스트기가 빠르게 반응했다. 닿자마자 선명해지는 두줄. " 와, 미치겠다, 말도 안 돼."
눈물이 났다. 이미 아이가 셋이고, 남편이 정관수술까지 했기에 혼란 그 자체였다. 자신도 없었다. 셋째 낳고 키우며 너무 힘들어서 울고불고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도 안돼'를 수십 번 내질렀다. 첫째 8살, 둘째 7살, 셋째 4살. 다 같이 캠핑도 다니고, 밤에 깨지 않고 잠 좀 잘 수 있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나 복직도 해야 된다고. 후. 머릿속이 난장판이었다. 더 낳을 생각이 없어 남편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정관수술까지 감행했는데, 그런데도 생기면 어쩌라는 건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남편과 근처 산부인과로 향했다. 아니길 바랐다. 제발.
넷째는 못 키워, 힘들어, 못해.
" 여기 심장 반짝이는 거 보이시죠? 벌써 6주 넘었네요~"
“ 선생님, 남편 정관수술했는데요? ”
“ 수술하셨구나~ 근데 생각보다 이런 경우 많아요. 수술이 제대로 안 되었거나, 새로운 루트로 힘센 정자들이 나오거나 할 수 있거든요. 확률은 낮지만 의외로 종종 있어요. 얼마 전에도 수술했는데 셋째 임신하신 분 오셨었어요~”
“ 얘는 넷째예요. 아들도 둘 있고, 딸도 있어요. 더 안 낳으려고 수술했거든요."
“ 어머나~ 진짜 애국자시네요! 어마어마한 확률을 뚫고 나온 건강한 정자예요. 진짜 특별한 아이요. 셋은 많이 봤는데 넷은 정말 드물긴 해요~ 나라에서 상 줘야 하는데! ” 라며 의사 선생님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남편은 힘센 정자라는 말에 의기양양해져서는 셋도 키우는데 넷을 못 키우겠냐며 벌써 단단한 의지를 드러냈다. 남자들이란 자신의 생산력(?)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나 보다. 저렇게 어깨 뽕이 솟은걸 보니.
넷째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작고 작은 심장으로 힘차게 생명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정관수술에도 불구하고 생긴 아이라면, 정말 하나님이 내려주신 아이가 아닐까, 이 아이는 태어나야만 하는 아이가 아닐까, 내가 무어라고 이 생명을 낳을지 말지 고민한단 말인가.
아, 나의 재능이 이것이로구나. 임신과 출산. 육아는 모르겠고,
38년 만에 알게 된 나의 재능. 이 재능 말고 다른 재능을 좀 더 주시지.
제발 아니길 바랐던 임신이었는데, 반짝이는 작은 생명을 보니 엄마라는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1시간 전만 해도 없던 모성애. 잘 품어서 또 잘 낳아야지.
"넷째도 딸이면 좋겠다. 그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