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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랬구나 Oct 28. 2023

국어 교과서를 사러 오신 할머니


평일 오전의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좋아한다.

주말의 그곳에서는 도저히 책을 찬찬히 볼 수 없다. 

필요한 책이 명확한 경우 딱 집어서 계산하고 나올 수는 있어도 천천히 책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고요한 평일 오전의 교보문고를 좋아한다니 문학적 깊이가 있고, 영적인 깨우침이라도 있는 책이라도 고르나 싶을 텐데 재미있게도 내가 몹시 마음을 다해 꼼꼼하게 살펴보는 책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문제집이다. 


꽤나 슬프고 웃기지만 아이 둘 엄마의 현실이다. 그래서 내용을 꼼꼼히 비교해 보고 살펴봐야 하는 아이들 문제집을 고를 때는 혼자서 평일 오전에 방문하고는 한다. 



그날은 첫째의 수학 문제집, 둘째의 영어 문제집을 보러 간 날이었다. 초등 문제집이 가득 꽂힌 서가 앞에 서서 이것저것 보고 있을 때였다. 고요한 교보문고의 공기를 깨는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 어디 있어요?"


어느 할머니의 씩씩한 목소리였다. 

난 속으로 아, 손주가 국어 교과서를 잃어버렸나 보다. 급하게 할머니가 사러 오셨나 보네. 직원이 알려준 방향대로 교과서 쪽으로 가신 할머니는 그곳에서 교과서를 보고 있던 다른 고객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난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할머니 목소리가 몹시 커서 대화 내용이 다 들렸다. 


"내가 공부할 거야.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 좀 찾아줘요."

할머니가 공부하신다고 하니 그쪽 고객들이 저쪽 자습서나 문제집을 보시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내 옆으로 오셨다. 


"애기 엄마, 내가 한글을 몰라서 공부를 하는데 교과서를 밤마다 베껴 쓰거든? 6학년 1학기까지 다해서 이제 2학기 책 사러 왔더니 저쪽 엄마들이 나보고 자습서나 문제집을 보라고 하대? 국어 문제집은 어디 있어요?"


아, 이제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께 필요한 건 국어 자습서나 문제집이 아닌 교과서라는 것도 확실해졌다. 


"어머니, 교과서 본문을 옮겨 적으시는 목적이면 문제집보다 교과서가 맞는 거 같아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하고 할머니와 함께 교과서 쪽으로 다시 갔다. 


"어머니,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는 가와 나로 나뉘어 있어서 두 권 사셔야 해요. 이렇게 두 권 가져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나 온 김에 중학교 것도 사갈래. 중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랑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도 부탁할게요."


국정 교과서인 초등 국어 교과서와 달리 중학교 교과서는 출판사가 여러 개라 잠시 고민이 되었으나, 지금 서가에 1,2학기가 모두 있고 할머니 보시기에 구성이 조금 더 시원시원해 보이는 출판사 것으로 골라드렸다.


이제야 숙제를 다 마쳤다는 시원한 표정으로 책을 품에 안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자식들은 다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나는 글씨를 몰라. 나는 장사를 하는데 글씨를 모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밤마다 국어 교과서를 옮겨 적었어."


멋지시다고 엄지를 치켜세워드렸더니 연신 늦게 배우는 게 부끄럽다고 하셨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멋지세요. 대단하세요!"


"멋지긴 뭘! 시간 뺏어서 미안해.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 애기 엄마 볼일 봐." 

하고 쿨하게 퇴장하신다. 



어디서 무슨 가게 하시냐고 여쭤나 볼걸 아쉬움이 남는다. 

이따금 찾아뵙고 공부 진도는 얼마나 나가셨는지, 교과서 구하기 어렵진 않으신지 여쭤보고 필요하신 교과서 구매를 도와드려도 좋을 텐데 생각하다가, 아이코 오지랖이구나 하고 말았다. 


가끔 무언가를 배우려다가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시작도 하지 않거나, 

시작하고 얼마 안 가 흐지부지하게 되는 나에게 할머니는 큰 울림을 주시고 후다닥 떠나셨다.


픽사베이에서 '공부'라고 검색하면 어린이와 젊은 사람 이미지만 뜬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공부한다고욧!


고단한 가게 일을 마치시고 밤마다 어떤 심정으로 1학년 1학기부터 써오셨을까. 

6학년 2학기까지 오시는 데는 얼마나 걸리셨을까.

요즘 아이들에겐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교과서가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벗일까.

나는 무엇을 매일 밤 읽고 쓰고 해야 할까. 


살다 보면 한 번씩 교과서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된다. 나에게 직접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하진 않지만 본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체로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오늘 그 할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할머니의 얼굴은 가을날 햇살처럼 해사하게 빛나셨다.   

무언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빛이 그럴 빛일까. 

나에게도 그런 빛이 났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_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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