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의 모든 추억들
MBTI에 따르면 나는 극 I 내향형이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할 게 너무너무 많다.
투두리스트를 쓰자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미국에서 살게 된 지 1년 동안 코로나가 터지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자연스레 나는 취미 부자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 미술입시 이후로는 그리지 못했던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들을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익숙한 수채화는 물론이고 집 근처 스탠퍼드대에서 하는 유화 초상화 클래스를 등록해서 그림이라는 미디엄에 몰두해 보았다. 유화는 정말 또 다른 세계였다. 수채화가 내지 못하는 색감과 풍부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클래스에서 강사는 색이나 스케치 방식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지시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연령대와 배경은 정말 다양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부터 평범한 직장인까지.
그들은 연필선과 붓터치는 왜 그렇게 했는지 심지어는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는데 붓이 이렇게 나갔는데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 등을 자유롭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나의 그림 또한 나의 지나온 삶을 잘 반영했다. 선 밖으로는 절대 나가서는 안 되는 그림이 내 손이 그리는 그림이었다. 잘 못하는 영어로 쭈뼛거리면서 "나는 디자이너로 일했었고, 그래서 그런지 내 붓질은 컴퓨터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린그림처럼 반듯하게 그리게 돼. 나도 조금 자연스럽게 하려고 일부러 노력 중이야 그리고 그게 재밌는 것 같아."
라고 설명했더니 사람들이 미소를 짓거나 끄덕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가까이 알게 되었다. 나란 사람은 좋아하는 색과 싫어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색들을 그들의 매력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 그림엔 색이 엄청 많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독을 하진 못했고 대학생 이후로는 디자인 관련 책 말고는 읽은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은 읽은 기억이 아예 없다. 미국에 와서 워크 퍼밋과 영주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시간이 엄청 엄청 많았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 읽기였다.
특히 독서모임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된 이후로 줌이나 스카입으로 하는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과 함께 영어원서를 읽는 것이 영어실력을 늘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어떤 책을 읽는 모임에 가입할지 열심히 고민했고 영어로 성경 읽기를 가입했다.
이 당시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당연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었는데 미국이라는 이 땅은 [당연한 게 하나도 없는 나라]였다. 난 기질적으로 예민한 편인데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들까지 내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사소한 것부터 적어보자면.. 신분증 같은 걸 만들려고 갔더니 직원이 실수해서 내 출신지를 North Korea로 쓰고 내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찍혀서 나올 뻔하질 않나, 운전면허를 따려고 갔는데 시험장소가 당일날 갑자기 바뀌었다(그것도 총 두 번이나) 그래서 연습했던 곳에서 시험보지 못하고 두 번 떨어졌다. 그리고 근처에서 산불이 나서 며칠간 낮이 밤처럼 깜깜해진 적도 있고,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새집인데도 개미가 집안 틈새로 미친 듯이 나오고, 약을 뿌려도 실리콘으로 막아도 내 팔 위에서 기어 다니는 걸 발견한 적도 있으니 소리를 한 두 번 지른 게 아니며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적도 여러 번이었다(물론.. 내가 예민한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6개월 넘게 집에서 일을 안 하고 막상 있으니 심적으로 불안해졌었다. 그래서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하는 영어 성경 읽기를 시작하며 성경이라는 책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영어와 한글 둘 다 읽을 수 있는 성경책을 구입해서 함께 보며 읽어나갔다. 이 시간 동안 처음으로 창세기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교회라는 곳은 엄마 따라 가끔 갔고 그 공간 밖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성경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참 감사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멀어지니 비로소 하나님이 항상 내 옆에 함께 계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이런 시간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쓰이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읽고 느낀 것과 이해되지 않는 부분 등을 나누니 다 같이 책 읽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경 외에도 함께 또는 혼자 읽은 책을 읽은 것들을 보니 꽤 된다. 클라라와 태양, 그리움을 요리하는 심야식당, 남아있는 나날, Grit, 동물농장, 등 한국어로 된 것도, 원서도 읽고 싶은 대로 읽었다. 대충 세어보니 한 달에 1.5권은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독서는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 20분이라도 꼭 읽고 시작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나는 기억력이 참 짧아서 매일 리마인드 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책으로 집의 물건을 늘리는 걸 원하지 않아서 ebook을 샀다. ebook을 살 때 고민했던 점은 딱 한 가지, 한국책을 볼 수 있는 교보문고 어플과 영어책을 읽을 수 있는 Kindle이 함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Boox라는 회사의 제품을 구매했고 지금은 버튼도 다 닳아버렸지만 어디든 나와 함께 가는 친구가 되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하나 꼽으라면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주인공이 자신이 힘들 때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케이크와 쿠키를 굽곤 했고 그것이 자신을 치유해 주곤 했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드라마는 너무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도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길 때마다 비스킷이나 간단한 빵을 굽는 게 어지러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이 되었다. 반죽의 색과 향 그리고 질감이 무언가를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가들이 오감놀이 하듯? 말이다. 개인적으로 유튜버 자도르님의 레시피를 좋아한다.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음식점이 LA 지역만큼은 많지 않아서 돈 내고 먹기 아까운 것에 더해 억지로 팁까지 줘야 하는 억울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뒤로는 웬만하면 집밥을 먹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집에서 키트를 가지고 막걸리를 해 먹을 때는 나 스스로가 웃기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들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지니 책, 유튜브나 인스타릴즈 등을 찾아보며 시도해 본 레시피들은 보물 같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사 먹을 때는 몰랐던 즐거움이 있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도 난 푹 익은 찌개를 좋아하는 편인데 처음 20분 정도 끓을 때 맛을 보면 흠.. 뭔가 부족한데 하고 성급해지곤 한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좀 더 기다린 후에 뚜껑을 열어보면 난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모습의 김치찌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먹기 좋기 딱 직전에 어느 순간 음식이 얼굴을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요리를 하면서 느낀 또 다른 나의 음식 취향을 발견했다. 난 한국음식과 이탈리안 음식을 반반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음식을 한 끼 먹으면 다른 한 끼는 파스타가 당긴다. 그래서 지금도 다양한 파스타 요리들을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바둑을 배우고 싶어진 계기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인공지능 책을 읽고 있는데 이세돌과 알파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아마존에서 바둑판과 바둑알을 구입했다. 다른 사이트들을보다보며 바둑판과 바둑알의 세계가 엄청나게 고급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굉장히 다양한 소재들로 만들어진 것들은 꽤 고가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 놓는 방법은 하나도 몰랐었기에 남편이 기본을 알려주었고 이세돌 님이 쓴 책을 읽기도 했다. 책을 읽다 보니 현재 우리가 쓰는 말들에서 바둑에서 온 것들이 참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수위, 무리수, 복기, 호구, 정석, 꼼수.. 등등. 그 외에는 아이패드나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또 재밌는 것은 상대와 바둑을 두다 보면 그 사람의 성격도 보이는 것 같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보수적인지 되게 공격적인지 또는 상대의 간을 보면서 자신의 전략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인지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에 '바둑으로 보는 심리' 뭐 이런 책도 있으면 재밌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에 영화를 보다가 목도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적당히 폭이 좁으면서 키가 아담한 나에게 너무 길지 않은 목도리를 사고 싶었지만 딱 원하는 걸 찾기가 어려웠기에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Wool and the gang이라는 브랜드가 키트와 설명서가 잘되어있는 것 같았고 주문한 지 3일 뒤에 키트가 도착했다. 털뭉치와 큰 대바늘, 그리고 설명서와 함께 뜨개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뜨개질이라는 게 정말 신기한 게 한쪽 바늘로 다 뜨고 난 뒤에 다른 쪽 바늘에 다시 옮기는 것 만으로 기다란 원단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보내니 포근하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결혼하고 나니 비로소 드디어 사고 싶은 그리고 내가 놓고 싶은 가구를 놓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니 무얼 사야 될지 모르겠더라. 특히 미국에서는 어디서 가구를 파는지 하나도 몰라서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핀터레스트에서 내가 어떤 느낌을 좋아하는지 이미지들을 모아보고 그걸 바탕으로 구글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은 Mid-century 스타일이었다. 우리 집의 전체적인 메인 컬러톤은 베이지+브라운으로 정했고 그 외에는 그것과 어울리는 색들로 포인트를 주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구입을 하고 여기저기서 소품들을 모으며 사진을 찍다가 한국에 있을 때 썼던 앱인 '오늘의 집'이 떠올랐다. 블로그를 올리듯 작성하고 오늘의 집 에디터의 도움을 받아 우리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 업로드했다. 그땐 막상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한창 집꾸미기에 불탈 때 그런 기록을 남겨둔 게 참 좋은 추억이다. 이제는 새로운 물건을 들이기보다 현재 갖고 있는 걸 잘 닦고 관리해서 오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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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나는 테니스도 시작했고 골프도 시도해 보았고 다시 피아노도 치기 시작했다. 미국이란 땅은, 특히 캘리포니아란 곳은 내게 서울보다 조금 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다. 그래서 더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었고 잘하고 못하고 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꽤 시간을 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여유롭게 시도해 본 다양한 것들이 내게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