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간지 1년이 채 안됐을 때 나의 영어 울렁증은 스타벅스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직원은 아무런 잘못이없다.
카페에서 커피 주문정도는 쉽겠지 생각하고 남편이 알려준 표현을 암기하며 스타벅스 매장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Can I get the an Iced vanilla latte?"라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직원이 나에게 사이즈를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직원이 답했다.
"아임쒀리 롸잇나우.. 우쥬라잇블라블라블라?"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빤히 보는 것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사이즈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조심스레 물었다.
"쒀리..? 캔유리핏댓?"
직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비슷하게 말했다.
"롸. 잇. 나. 우, 블라블라 out of whole milk, 블라블라 블라블라"
생각했다. '아 우유가 다 떨어졌다고 하는 건가.. 아니 그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말이 길지.. 그게 아닌가?'
멋있게 주문하고 싶었는데 뭔가 삐걱거린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직원이 뭔가 다른 걸 나에게 권유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난 그래서 "Yes! it sounds good"라고 말해버렸다. 이해는 정확히 못했지만 얼른 커피를 받아서 매장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쉽지만 어렵게 우유가 아닌 대체 우유(아마도 오트우유 혹은 아몬드우유)가 들어간 아이스라테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별일도 아닌데 아르바이트생의 잠깐 찌푸린 미간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간단한 말도 못알아듣고 말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 뒤로는 어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뒤에도 다양한 상황들을 맞닥뜨렸다. 아메리카노를 시키면 그 위에 우유나 다른 걸 얹을 거냐는 질문을 이해 못 해서 버벅거리기도 했고, 샌드위치를 시키면 데워줄까 말까에서도 헷갈려하며 버벅댔다.
그래서 늘 스타벅스를 갈 때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매장에 들어갔다. 나한테 커피의 사이즈를 물어볼 수 있고, 우유 종류를 물어볼 수 있으며, 카드냐 현금이냐고 묻는 질문 등의 경우의 수를 대비했다. 내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커피 주문정도에서 무너질 수 없다는 이상하리만큼 비장한 마음 준비였다.
비슷한 경우가 마트에서도 있었다.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가져가면 직원 아저씨가 웃으며 말을 건다. 그냥 안부를 묻는 "How are you?"이면 "I am good, and you?"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어느 날 한 번은 아저씨가 쉘라쉘라 뭐라고 했다. 나는 또 긴장을 해서 안부를 묻는 건 줄 알고 굿! 예쓰 뭐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다급하게 "Oh, no no, sorry, that's fine"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지역사회에 기부를 할 거냐는 질문이었다.
이쯤 되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못 알아듣고 긴장을 하는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앉아서 듣기 평가 테이프를 틀어놓으면 다 알아들을 쉬운 말들을 나는 왜 이렇게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을까?
바로 흔히들 이야기하는 영어울렁증이라는 것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언어에서는 비슷한 울렁증 증상을 느껴본 적이 없다. 일본이나 다른 여행지에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책이나구글링 해서 배운 간단한 문장을 어설프게 시도해도 주눅 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어는 어릴 때부터 학교나 학원에서 꾸준히 배워왔고 자라온 환경 속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 = 똑똑한 사람,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잠재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눈을 너무 많이 의식하면서 똑똑하고 뭐든지 잘하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갖고 싶었던 내가 너무 긴장을 해서 결정적인 실수를 할 뻔한 사건은 나의 영주권 인터뷰에서 일어났다.
이때는 코로나 시기여서 가까운 곳이 모두 예약이 꽉 차있었고 아주 먼 지역에서 인터뷰가 잡혀서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에 나와 남편은 새벽 4시에 출발해 3시간가량을 차를 타고 인터뷰 보는 곳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긴장감과 적막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기다림 끝에 영주권 심사관의 방에 도착하니 파란 눈의 백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꽤 친절한 말투와 태도여서 이내 마음이 놓였다. 다양한 질문들을 내게 던졌는데 나는 대부분 간단했기에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어서 대답 하는데에 문제가 없었다.
웬만큼 질문을 많이 한 그녀는 종이를 넘기며 'Community'와 'Party'라는 (내가 들린) 단어를 쓰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혼자 넘겨짚었다. '아, 내가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에 잘 소속될 수 있는지를 묻나?'라고 착각하고 아주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게 "Yes! of course!"라고 대답했다.
심사관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좌우로 돌렸다가 아래로 내리더니 작은 한숨을 쉬고 친절하게도 질문을 리프레이징 해주었다.
갑자기 남편이 또 예스라고 대답하려는 나를 제지하며 한국말로 조용히 말했다.
"공산당과 관련해 가까이하거나 가입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잖아"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No no no of course not!"
...
그렇게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몇달 뒤 다행히도 나는 영주권 카드를 받았다.
영주권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못 알아들었는데도 알아듣는 척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웬만하면 내가 이해한 바를 다시 확인하는 질문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로도 나의 영어 리스닝&스피킹 연습은 계속되었다.
대학원을 가게 된 뒤에는 좀 더 나아졌지만 코로나 때여서 리모트로 해야 했기에 사람들과의 소통이 아무래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 외에도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했다. 그중 도움 됐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몇 가지가 있다.
미드 <프렌즈>를 총 두 번 정도 돌려봤다. 프렌즈는 말의 속도가 생각보다 느려서 자막을 켜고 보고 두 번째에는 자막을 끄고 봤다. 그 외에도 <섹스 앤 더시티>, <모던패밀리>, <길모어걸즈> 등을 재밌게 봤다. 나의 최애는 프렌즈와 섹스 앤 더시티다. 그 당시 미국 분위기가 딱 내가 어릴 때부터 상상했던 미국 느낌!
<캠블리>와 <링글>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해서 원어민과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플랫폼의 종류에 따라 장단점이 다르다. 해외에 살면서 이런 것을 이용하는 게 의아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코로나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환경이 필요했다. 캠블리는 가격이 좀 더 저렴했지만 튜터들이 시간 때우는 느낌으로 대화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쉬웠고, 링글은 대화소재 등의 자료들을 준비해 줘서 좋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아쉬웠다.
특히 나중에 회사 인터뷰 보기 전에 이런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서 연습했고 도움이 많이 됐다.
또한 <Meetup>이라는 플랫폼도 유용했다. 다양한 관심사에 따른 이벤트들을 줌으로 참여할 수 있고 난 주로 디자인이나 책과 관련된 밋업에 참여했다.
<ADP List>는 멘토링 플랫폼인데 주로 디자이너들이 많고 포트폴리오 리뷰나 인더스트리 관련해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만난 멘토들과 포트폴리오리뷰나 인터뷰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혼자 원서 읽기는 진도가 잘 안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읽는 북클럽을 가입했다. 현재는 <나란>이라는 북클럽에서 활동 중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책으로 시작했기에 흥미를 붙일 수 있었다. 너무 긴 책은 소화하기 힘들어서 '동물농장' 같은 책이 길이도 적당하고 읽기 좋았다.
요즘 내가 활동 중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추천하고 싶은 그룹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공개 연설(Public Speaking)과 리더십 스킬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비영리 국제 조직이다. 1924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현재 전 세계에 수천 개의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도 퍼블릭 스피킹에 진심이고 그들도 어렵다고 생각하나 보다.
이 모임은 지역 곳곳에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임이 열린다. 나는 회사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모임에 가입해서 활동 중이다.
지금도 영어로 말할 때면 긴장된다. 어느 정도 말할 바를 생각해 두고 미팅에 참여하지 않으면 너무 떨린다. 하지만 예전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일취월장 그 자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노력하고 있는 시간들이 쌓이는 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너 자신을 몰아세우지 마, 너는 나중에 아주 잘하게 될 거야. 조금 더 마음 편안히 현재를 즐기면서 해봐. 사람들은 네 생각보다 너를 평가하지 않아"